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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기념일
- 세계 반부패의 날 (국제연합)
매년 12월 9일은 국제연합(UN)이 부패 방지 노력의 중요성을 알리고, 전 세계적으로 부패 척결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지정한 **‘세계 반부패의 날(International Anti-Corruption Day)’**입니다. 이 날은 2003년 12월 9일 멕시코 메리다에서 국제연합 부패 방지 협약(UNCAC)에 서명한 것을 기념하여 제정되었습니다. UNCAC은 부패를 방지하고 척결하기 위한 국제적인 협력의 틀을 제공하는 포괄적인 법적 구속력이 있는 문서입니다. 이 협약은 예방 조치, 형사 처벌, 국제 협력, 자산 회수 등 부패와 관련된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세계 반부패의 날은 정부, 민간 부문, 시민 사회, 미디어 등 모든 이해 관계자가 부패의 해악에 맞서고 투명성과 책임성을 증진하는 데 동참하도록 촉구하는 중요한 계기입니다. 부패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며, 인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범죄입니다. 따라서 이 날은 부패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다짐하고, 청렴한 문화를 조성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국제연합은 매년 이 날을 맞아 특정 주제를 정하고 관련 캠페인과 행사를 전개하여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한국 또한 UNCAC의 당사국으로서 부패 방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국민권익위원회 등 관련 기관을 통해 투명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정책과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 독립기념일 (탄자니아)
1961년 12월 9일, 동아프리카의 국가인 탕가니카(Tanganyika)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입니다. 탕가니카는 현재의 탄자니아 본토를 이루는 지역으로,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독일의 동아프리카 식민지였으나 전쟁 후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령을 거쳐 국제연합의 신탁 통치령이 되었고, 영국이 이를 관리하였습니다. 독립 운동은 **줄리어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가 이끄는 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 연합(TANU)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독립을 달성하였습니다. 독립 후 니에레레는 탕가니카의 초대 총리가 되었고, 이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1964년 4월, 탕가니카는 잔지바르(Zanzibar)와 합병하여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United Republic of Tanzania)**을 수립하였습니다. 독립기념일은 탄자니아 국민들에게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국가적 자부심과 단결을 고취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수도 도도마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기념식, 군사 퍼레이드, 문화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립니다. 이 날은 또한 니에레레 대통령의 지도력과 업적을 기리는 날이기도 하며, 탄자니아의 평화롭고 안정적인 독립 과정은 아프리카의 다른 국가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독립 이후 탄자니아는 사회주의적 아프리카 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하는 우자마(Ujamaa) 정책을 추진하는 등 독자적인 발전 노선을 걸었으며, 현재는 동아프리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 집단살해죄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 채택일 (국제연합)
1948년 12월 9일,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이 만장일치로 채택된 날을 기념합니다. 이 협약은 **‘제노사이드(Genocide)’**를 국제법상 범죄로 규정하고, 이를 저지르거나 공모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최초의 국제 조약입니다. 협약의 채택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생한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규모 인종 청산의 참혹한 경험을 배경으로, 다시는 그러한 잔혹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국제적인 법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인류의 의지를 반영합니다. 집단살해죄는 민족, 인종, 종교, 또는 국민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파괴할 목적으로 행해지는 행위를 의미하며, 협약은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 자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처벌받아야 함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협약은 1951년 1월 12일에 발효되었으며, 국제법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12월 9일은 이 중요한 국제 규범의 탄생을 기념하며, 인류의 보편적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을 수호하려는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노력을 상기시키는 날입니다. 또한, 국제 형사 재판소(ICC)와 같은 국제 사법 기구가 집단살해죄를 다루는 법적 기반을 제공하였습니다. -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일 (노르웨이)
노르웨이에서는 12월 9일이 오슬로 시청 앞 광장에 설치되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의 공식 점등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날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겨울 축제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행사 중 하나입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전통적으로 노르웨이의 산림에서 선별된 크고 아름다운 전나무로, 수많은 전구와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집니다. 이 점등식에는 오슬로 시장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과 시민들이 대거 참석하여 함께 카운트다운을 외치며 트리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을 축하합니다. 행사장 주변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캐럴 공연과 다양한 겨울철 이벤트가 펼쳐져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노르웨이의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은 단순한 지역 축제를 넘어, 북유럽의 겨울 전통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특히 노르웨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 제공한 도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매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선물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어, 이 날은 국제적인 우정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오슬로 시청 앞의 트리는 새해를 맞이할 때까지 불을 밝히며, 추운 겨울밤 시민들과 방문객들에게 따뜻한 빛과 희망을 선사합니다. 이 전통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의 기쁨과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소중한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 제헌절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제헌절은 특정한 날짜가 고정되어 있지는 않으며, 이 용어는 주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헌법이 제정되고 효력이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칭하는 데 사용됩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1900년 7월 9일, 영국 의회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헌법 제정법(Commonwealth of Australia Constitution Act 1900)을 통과시킨 날을 기념하기도 합니다. 이 법은 오스트레일리아의 6개 식민지(뉴사우스웨일스, 빅토리아, 퀸즐랜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를 하나의 연방 국가로 통합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제헌절의 진정한 의미는 1901년 1월 1일에 연방이 공식적으로 출범하고 헌법이 발효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헌법은 연방 정부의 구조와 권한, 주 정부와의 관계, 국민의 기본 권리 등을 규정하는 국가의 최고 법규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 의회의 법률을 통해 연방을 수립하였지만, 헌법 제정 과정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 주민들의 자발적인 투표와 합의를 거쳤다는 점에서 자주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제헌절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국가 정체성과 통일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공식적인 제헌절 공휴일은 없지만, 연방 결성 과정의 의미를 기리는 다양한 교육 및 기념 활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헌법은 오스트레일리아가 독립적인 주권 국가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 자유와 민주주의의 날 (몰타)
몰타 공화국에서는 매년 12월 9일을 **‘자유와 민주주의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합니다. 이 날은 몰타의 정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요 기념 대상은 1974년 12월 13일에 몰타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에서 제외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 사건과, 1979년 3월 31일에 마지막 영국군 부대가 몰타에서 철수하여 몰타가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달성한 사건입니다. 비록 날짜는 다르지만, 12월 9일은 이 두 사건을 포함하여 몰타가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 모든 노력을 기리는 날로 통합되어 기념되고 있습니다. 몰타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날은 과거 식민 지배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몰타 국민 스스로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 역사적 성취를 되새기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날을 통해 몰타는 민주주의의 가치, 주권의 소중함, 그리고 국민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수도 발레타에서는 국경일 기념행사와 함께 몰타의 역사와 문화적 유산을 기리는 다양한 활동이 진행됩니다. - 인권의 날 기념식 (콜롬비아)
콜롬비아에서는 매년 12월 9일을 **‘인권의 날’**로 기념합니다. 이 날은 1948년 12월 10일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 인권 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UDHR)**의 정신을 기리고, 콜롬비아 사회 내에서 인권 존중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정되었습니다. 세계 인권 선언 채택일 하루 전인 9일을 기념일로 정한 것은, 인권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인식 제고와 더불어 콜롬비아 내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인권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콜롬비아 정부는 이 날을 맞아 인권 관련 법규의 시행 상황을 점검하고, 인권 증진을 위한 새로운 정책과 프로그램을 발표합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인권 단체, 시민 사회, 학계 등이 참여하는 세미나, 토론회, 기념 행사 등이 열립니다. 콜롬비아는 오랜 기간 동안 내부 무력 분쟁과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인권 침해 문제가 심각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권의 날은 과거의 아픔을 되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국가적 의지를 다지는 중요한 날입니다. 이 날을 통해 콜롬비아는 국제 사회와 협력하여 인권 기준을 준수하고, 특히 취약 계층의 권리 보호에 힘쓰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합니다.
🕰 역사 속 오늘
① 고대~19세기
- 1608년 – 존 밀턴 탄생 (영국)
1608년 12월 9일, 영국의 저명한 시인이자 사상가인 **존 밀턴**이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서구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그의 대표작인 서사시 **《실낙원》(Paradise Lost)**은 기독교 신화의 주요 사건들을 다루면서 인간의 자유 의지와 신의 정의에 대한 심오한 주제를 탐구한 작품입니다. 밀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고전 교육을 받았으며,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습니다. 그는 17세기 영국 청교도 혁명기에 활동하며 정치와 종교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밀턴은 의회파의 편에 서서 찰스 1세의 전제 정치에 반대하는 논문을 다수 발표했으며,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 시절에는 라틴어 담당 국무장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저술들은 언론의 자유, 이혼의 자유 등 급진적인 사상을 담고 있어 당대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652년경에는 실명하여 시각을 잃었으나, 구술을 통해 문학 활동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왕정 복고 후에는 한때 투옥되기도 했지만, 그의 문학적 업적은 후대에 걸쳐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실낙원》 외에도 **《복낙원》(Paradise Regained)**, 비극 **《투사 삼손》(Samson Agonistes)** 등의 작품이 있으며, 그의 문학은 언어의 웅장함과 사상의 깊이로 인해 영어권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밀턴은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 1625년 – 바르샤바 왕궁 화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1625년 12월 9일,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수도였던 **바르샤바 왕궁**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바르샤바 왕궁은 폴란드 국왕과 리투아니아 대공의 공식 거처이자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폴란드 의회(Sejm)가 소집되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이 왕궁은 원래 중세 시대에 건설되었으나, 16세기 후반 지그문트 3세 바사 국왕이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긴 후 대대적인 개축과 증축이 이루어져 웅장한 르네상스 및 초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로 변모하였습니다. 1625년의 화재는 왕궁의 일부를 심각하게 손상시켰으며, 특히 왕실 거주 공간과 중요한 국가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던 일부 건물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화재는 단순한 재산 피해를 넘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정치적, 문화적 상징인 왕궁의 위엄에 손상을 입힌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화재 이후 왕궁은 재건축되었으나,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전쟁과 재난을 겪으며 끊임없이 보수와 복원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바르샤바 왕궁은 폴란드 역사의 부침을 함께 해온 상징적인 건축물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전후에 국민들의 모금과 노력으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습니다. 이 화재 사건은 당시 왕궁의 취약성과 대형 건축물의 재해 대비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습니다. - 1793년 – 뉴욕시, 노예제 폐지 논의 시작 (미국)
1793년 12월 9일, 미국 뉴욕주 의회에서 주 내 노예제도를 점진적으로 폐지하기 위한 법안에 대한 논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미국 북부 주들이 노예제를 폐지하고 자유주로 전환하는 흐름의 일환이었습니다. 당시 뉴욕주는 북부 주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노예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특히 농업과 상업 분야에서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뉴욕에서의 노예제 폐지 논의는 경제적, 사회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복잡한 과정이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노예제 폐지론자들(Abolitionists)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고, 도덕적, 종교적 이유로 노예제를 반대하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1793년에 시작된 논의는 곧바로 폐지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뉴욕주가 결국 1799년에 점진적 노예제 폐지법(An Act for the Gradual Abolition of Slavery)을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이 법은 특정 날짜 이후에 태어난 노예의 자녀들에게만 자유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완전한 폐지까지는 수십 년이 걸리는 점진적인 접근 방식을 택했습니다. 마침내 1827년 7월 4일에 뉴욕주 내의 모든 노예가 해방되었습니다. 1793년의 논의 시작은 뉴욕이 노예제라는 어두운 유산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여정을 공식적으로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 1824년 – 아야쿠초 전투 발발 (페루/남아메리카)
1824년 12월 9일, 페루의 아야쿠초 인근에서 **아야쿠초 전투(Battle of Ayacucho)**가 발발하였습니다. 이 전투는 남아메리카 독립 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 중 하나로,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스페인 식민지 군대와 벌인 결정적인 충돌이었습니다. 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시몬 볼리바르**는 전쟁의 큰 틀을 지휘하였으며, 현장에서는 수크레 장군의 뛰어난 지휘 아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스페인 군대는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으며, 이로 인해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의 식민 통치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아야쿠초 전투에서의 승리는 페루의 독립을 확정 짓고, 스페인의 마지막 주요 거점이었던 페루 부왕령을 해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전투 후, 스페인 총독과 고위 장교들은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이는 스페인이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볼리비아(당시에는 '상부 페루'로 불림)를 포함한 남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이 독립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아야쿠초 전투는 라틴 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독립의 상징이자 남아메리카 국가들이 주권 국가로서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크레 장군은 이 공로로 '아야쿠초의 대원수' 칭호를 받았습니다. - 1884년 – 미국 발명가, 롤러코스터 특허 획득 (미국)
1884년 12월 9일, 미국의 발명가 **라 마르쿠스 애드나 톰슨(LaMarcus Adna Thompson)**이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와 관련된 중요한 특허를 획득하였습니다. 톰슨은 현대적인 개념의 놀이기구인 롤러코스터를 개발하고 상업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획득한 특허는 주로 **‘중력 활강 열차’(Switchback Railway)**로 불리는 초기 형태의 롤러코스터 설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톰슨의 롤러코스터는 1884년 6월 16일 뉴욕 코니아일랜드에서 처음 개장하여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초기 롤러코스터는 두 개의 높은 탑 사이에 트랙이 설치되어 승객들을 한쪽 탑으로 끌어올린 다음, 중력의 힘으로 다른 쪽 탑으로 활강하게 하는 왕복형 구조였습니다. 이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간단한 경사로를 이용한 놀이기구와는 달리,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차량을 사용하여 탑승자에게 짜릿한 속도감을 제공하는 현대적인 롤러코스터의 원형을 제시하였습니다. 톰슨은 이후에도 수많은 롤러코스터 관련 특허를 출원하며 이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발명은 단순한 놀이기구를 넘어, 대중 오락 산업과 현대 유원지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롤러코스터는 이후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다양한 형태와 기술적 진보를 거치며 오늘날의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로 발전했습니다. - 1897년 – 마르세유에서 텔레비전 용어 소개 및 시연 (프랑스)
1897년 12월 9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콘스탄틴 페르스키(Constantin Perskyi)**가 전기를 이용하여 움직이는 이미지를 전송하고 수신하는 장치의 초기 개념과 작동 원리를 선보였습니다. 페르스키는 러시아 출신의 과학자로, 이 시연에서 비록 오늘날의 전자식 텔레비전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텔레비전'이라는 용어 자체를 대중에게 처음 소개하고 동화상 전송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큽니다. 페르스키는 1900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전기 회의에서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이후 **'텔레비전'**은 원거리에서 영상을 전송하는 기술을 통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1897년의 시연은 기계식 디스크와 광전 효과를 이용한 초기 텔레비전 기술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과학자들과 발명가들이 이 기술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1920년대 후반에는 실제로 상업화가 가능한 기계식 텔레비전 시스템이 등장하였습니다. 텔레비전의 발명은 인류의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대중 매체의 역사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페르스키의 1897년 시연은 이러한 혁명의 시초를 알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② 20세기 이후
- 1931년 – 스페인, 알칼라 사모라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 선포 (스페인)
1931년 12월 9일, 스페인이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Niceto Alcalá-Zamora)**를 대통령으로 하는 **제2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1931년 4월 알폰소 13세 국왕이 퇴위하고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의 중요한 법적 조치였습니다. 새로운 헌법은 스페인을 **"모든 계층의 노동자가 조직되고 자유와 정의의 원칙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규정하며, 광범위한 사회 개혁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 헌법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고,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며, 교육 개혁과 지방 자치권 확대 등을 포함하는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알칼라 사모라는 공화국 수립 초기부터 임시 대통령을 맡아왔으며, 헌법 제정 후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제2공화국은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광범위한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 개혁을 시도한 체제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좌파와 우파의 극심한 이념 대립과 사회적 불안정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의 정치적 갈등과 불안정은 결국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제2공화국은 1939년 내전에서 공화파가 패배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1931년 12월 9일의 헌법 제정과 공화국 선포는 스페인 민주주의의 짧지만 중요한 시기를 상징합니다. - 1941년 – 2차 세계대전: 중국, 영국, 미국, 일본에 선전포고 (중국, 영국, 미국)
1941년 12월 9일, **중국, 영국, 미국**을 포함한 주요 연합국들이 **일본 제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는 이틀 전인 12월 7일(현지 시각)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고, 동시에 동남아시아의 영국 및 네덜란드 식민지를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특히 중국은 1937년부터 일본과 전면적인 중일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나, 진주만 공격 이후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통해 일본에 대한 항전을 국제적인 전쟁의 틀 안에서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선전포고는 일본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 식민지에 대한 침략에 대응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경우, 루스벨트 대통령이 진주만 공격을 **"치욕의 날"**로 규정하며 의회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하였고, 의회는 이를 압도적인 찬성으로 승인하였습니다. 이 선전포고들은 태평양 전쟁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의 전선을 유럽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확대하고, 전 세계적인 규모의 연합국 대 추축국의 구도를 명확히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전쟁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으로 비화하였고, 연합국은 일본을 상대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군사 작전과 외교적 노력을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 1953년 – 미국 GE, 핵융합 반응을 이용한 전력 생산 연구 시작 (미국)
1953년 12월 9일, 미국의 거대 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GE)**이 핵융합 반응을 이용한 전력 생산 연구에 착수한다고 공식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핵분열을 이용하는 기존의 원자력 발전과는 달리, 태양이 에너지를 생성하는 원리와 유사한 **핵융합**을 통해 무한하고 청정한 에너지를 얻으려는 시도의 초기 단계였습니다. 당시 GE의 연구는 극도로 뜨거운 플라즈마 상태의 수소 동위 원소를 자기장을 이용하여 가두고, 이들을 융합시켜 에너지를 생산하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GE의 핵융합 연구 참여는 민간 부문에서 이 잠재적인 에너지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당시에는 핵융합 기술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주로 연구되고 있었으나, GE는 이를 상업적인 전력 생산에 활용하고자 하는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였습니다. 핵융합은 핵분열 발전의 단점인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문제가 적고, 연료인 수소 동위 원소가 바닷물 등에서 쉽게 얻을 수 있어 미래 에너지원으로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비록 GE의 초기 연구는 곧바로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이 발표는 핵융합 연구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알리고, 이후 전 세계적인 핵융합 연구 개발 경쟁을 촉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핵융합 발전은 현재까지도 난이도 높은 과학적, 공학적 과제로 남아 있으나, 지속적인 국제 협력을 통해 개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 1961년 – 아프리카 탕가니카, 영국으로부터 독립 (탕가니카, 現 탄자니아)
1961년 12월 9일, 동아프리카의 **탕가니카**가 영국의 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탕가니카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독일 동아프리카의 일부였으나, 전쟁 후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와 국제연합의 신탁 통치를 거치면서 영국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독립 운동은 **줄리어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가 이끄는 **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 연합(TANU)**을 중심으로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961년의 독립은 탕가니카가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자체적인 정치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독립 후 니에레레는 초대 총리가 되었으며, 이듬해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1964년 4월, 탕가니카는 잔지바르 섬과 합병하여 현재의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탕가니카의 독립은 아프리카 대륙의 다른 식민지 국가들에게도 독립의 영감을 제공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독립 이후 탄자니아는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우자마(Ujamaa)** 정책을 추진하며 독자적인 발전 노선을 모색했습니다. 12월 9일은 현재 탄자니아의 국경일인 '독립기념일'로 지정되어 국민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날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 1987년 – 제1차 인티파다 발발 (팔레스타인)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 점령 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 **제1차 인티파다(Intifada)**가 발발하였습니다. 인티파다(Intifada)는 아랍어로 '봉기' 또는 '떨쳐 일어남'을 의미하며,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의 점령 통치에 저항하며 대규모로 전개한 비폭력 및 폭력 시위, 파업, 보이콧 등의 민중 봉기였습니다. 봉기의 직접적인 계기는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용 트럭과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탄 차량이 충돌하여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었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점령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차별, 열악한 생활 환경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인티파다는 돌팔매질을 하는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의 이미지로 상징되기도 하며, 이스라엘 군과의 충돌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봉기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를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국제 사회의 관심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집중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1차 인티파다는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협정을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PA)가 설립되는 등 분쟁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시작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중동 지역 분쟁의 역사에서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 의지를 보여준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 1990년 – 레흐 바웬사, 폴란드 초대 민선 대통령 당선 (폴란드)
1990년 12월 9일, 폴란드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가 당선되어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민선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레흐 바웬사는 원래 그단스크의 조선소 전기 기술자 출신으로, 1980년대 동유럽 공산 정권에 맞선 비폭력 저항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폴란드 자유 노조인 **'연대(Solidarność)'**를 결성하고 이끌면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을 조직화하였고, 이는 결국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89년의 부분 자유 선거와 공산당의 권력 이양 이후, 1990년의 선거는 폴란드가 공산주의 체제를 완전히 벗어나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하는 중요한 절차였습니다. 바웬사의 당선은 폴란드 국민들이 민주적 개혁과 시장 경제로의 전환을 확고히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공산주의 잔재 청산, 시장 경제 도입, 그리고 서방 세계와의 관계 강화 등 폴란드의 민주화 및 경제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바웬사는 이미 1983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대통령 당선은 폴란드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섰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 2017년 – 이라크 정부, IS에 대한 승리 선언 (이라크)
2017년 12월 9일, 이라크 정부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이슬람 국가(IS)**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이라크의 하이데르 알 아바디 당시 총리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라크 군이 이라크-시리아 국경을 완전히 장악하고 IS로부터 모든 이라크 영토를 해방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IS는 2014년 여름 이라크 북부와 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고 '칼리프 국가'를 선포하며 국제 사회에 큰 위협을 가했습니다. IS는 잔혹한 통치 방식과 대규모 테러 행위로 악명이 높았으며, 이라크와 시리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라크 정부군은 국제연합의 지원을 받는 국제 동맹군의 공습 지원과 함께,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민병대 등 다양한 세력과의 연합 작전을 통해 IS와의 힘겨운 전투를 벌였습니다. 특히 모술과 같은 주요 도시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큰 희생이 따랐습니다. 2017년의 승리 선언은 이라크 국민들이 겪었던 오랜 전쟁과 고통의 시기를 공식적으로 마감하고, 국가 재건과 안정화의 길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비록 IS의 잔당 세력이 여전히 위협으로 남아있었지만, 이라크의 영토 주권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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