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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확장/조선왕조실록 100(오디오)

1화 - 이성계의 고려 몰락과 조선 건국 (태조 1년)

by 시넘사 2025.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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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글이 부담스럽다면, 그냥 들어보셔도 좋아요.
요약 오디오는 글 맨 아래에 있어요.

위화도회군
1388년 위화도 회군

이성계의 고려 몰락과 조선 건국 (태조 1년)

📚 목차

  1. 조선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2. 이성계의 부상과 고려의 흔들림
  3. 위화도 회군 — 역사의 분기점
  4. 정권 장악과 개혁 세력의 등장
  5. 공양왕 즉위와 고려 왕조의 최후
  6. 조선 건국의 절차와 ‘선양’이라는 형식
  7. 조선 태조의 즉위와 태조 1년의 기록
  8. 역사 속 평가: 영웅인가, 역성혁명의 주도자인가
  9. 몰락과 건국, 그 경계에서

1.  조선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조선은 이성계가 무력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편을 펼치면, 단순한 정복자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속에는 고려 말기 왕조의 내부 붕괴, 시대의 요구, 사대부의 이상이 함께 뒤엉켜 있습니다. 이성계라는 인물이 이 모든 흐름의 중심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 — 이것이 핵심입니다.

2. 이성계의 부상과 고려의 흔들림

고려 후기, 중앙 정부는 권문세족에 의해 피폐했고 백성들의 삶은 원 간섭기 이후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이 와중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함경도 출신의 무신 이성계입니다.

  • 풍부한 실전 경험 (여진 정벌, 홍건적 격퇴 등)
  • 민심의 지지를 받는 영웅
  • 최영, 정도전 등 엘리트들과의 연대

고려 후기의 정치적 무기력 속, ‘강한 자’가 아니라 ‘유능한 자’로 인식된 점이 포인트입니다.

3. 위화도 회군 — 역사의 분기점

1388년, 고려 우왕의 명으로 요동 정벌에 나선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을 돌려 개경으로 회군합니다.

“내가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이유는 백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장마철에, 지친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넌다는 건 옳지 않다.”

이성계의 회군은 단순한 명령 불복종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과 민심의 결집이 겹친 역사적 선택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왕은 폐위, 최영은 처형, 이성계는 실질적인 권력을 갖게 됩니다.

4. 정권 장악과 개혁 세력의 등장

이성계는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곧바로 개혁에 착수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곁에는 이미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사대부 개혁파가 자리하고 있었고 이들은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 과전법 제정 (1391년): 토지 기반 개혁을 통해 사대부 중심의 질서 형성
  • 권문세족의 약화: 조세 개편, 노비 해방 등으로 불만층 흡수
  • 이씨 왕조 세우기 위한 정당성 확보 준비

5. 공양왕 즉위와 고려 왕조의 최후

이성계는 곧바로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합니다. 이는 ‘역성혁명’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양왕조차 이성계의 권위 앞에서 그림자에 불과했고, 결국 1392년, 공양왕은 선위하게 됩니다.

6. 조선 건국의 절차와 ‘선양’이라는 형식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7월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양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불가하므로, 대신들이 천명을 따라 신왕(이성계)께 왕위를 권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선양’이라는 방식입니다. 무력 쿠데타가 아니라 민심과 하늘의 뜻을 받아 왕위가 넘어갔다는 상징적 장치였던 것이죠.

7. 조선 태조의 즉위와 태조 1년의 기록

1392년, 조선의 첫 왕이 된 태조 이성계는 곧바로 새로운 질서 정립에 돌입합니다.

  • 국호 결정: 조선 → 고려, 화령 등 후보 가운데 삼한의 옛 이름 ‘조선’을 택함
  • 한양 이전 논의 시작: 풍수와 전략적 입지를 고려해 수도 이전 계획 착수
  • 개국 공신 서훈 및 정치 구조 정비: 정도전, 조준 등 핵심 개국 세력을 중심으로 체계 마련
  • 불교 중심에서 유교 정치 체제로 전환 착수

8. 역사 속 평가: 영웅인가, 역성혁명의 주도자인가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린 인물이자, 조선을 세운 영웅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가문을 위해 조국을 팔았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가 시대의 요구를 읽었는가?”입니다.

  • 혼란한 고려 말기 → 새로운 리더십 필요
  • 무력보다 설득과 절차 중시 → 위화도 회군 이후 바로 왕이 되지 않음
  • 현실 정치와 이상 정치 사이의 절충 → 개혁파와의 연합

9.  몰락과 건국, 그 경계에서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년은 단지 '한 왕의 등장'이 아닙니다. 700년 고려의 몰락과 500년 조선의 시작이 교차하는 역사적 지점입니다. 그 한가운데에는 이성계라는 단단한 인간과, 시대를 바꾸려는 지식인들, 그리고 국가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많은 백성들의 숨결이 존재합니다.

 

📜 시조로 전해지는 역사적 순간 – 이방원과 정몽주의 주고받음

고려 말, 조선 건국을 앞두고 벌어진 격렬한 정치적 대립 속에서 이방원 정몽주는 시조로 서로의 의지를 전했다고 전해집니다.

📝 이방원의 시조 –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보낸 시조, 『해동악부』 · 『포은집』 등 전승

📝 정몽주의 시조 –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몽주의 응답 시조, 『포은집』 등 

 

이 두 시조는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서, 신념과 충절, 회유와 결단이 맞붙은 고려 말의 뜨거운 정치 현실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이 시조는 의리와 정의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위 내용을 들을 수 있습니다

 

 

📜 『이성계의 고려 몰락과 조선 건국 (태조 1년)』 요약 

14세기 말, 고려는 내부적으로 문란하고 외세의 위협에 시달리던 혼란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되고 명나라가 부상하는 가운데, 고려는 외교와 군사 모두에서 방향을 잃고 있었다. 이 시기, 신흥 무장 세력으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이성계였다. 그는 함경도 지방의 지역 세력 출신으로,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며 민심을 얻고, 무장으로서 실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군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1388년, 고려는 요동 정벌을 강행하려는 최영과 이를 반대하는 이성계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당시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출정을 반대하며, 결국 위화도 회군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이 회군은 단순한 군의 복귀가 아니라, 사실상 무력 쿠데타였으며, 이로 인해 고려의 정치는 결정적으로 흔들린다.

이후 이성계는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고려의 체제를 유지한다. 그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신진 사대부와 손을 잡고 개혁 정치를 추진하며 민심을 얻는다. 과전법 실시, 불교 권력 견제, 신분 질서 재정비 등 새로운 국가 구상을 차근히 준비해나간다.

1392년, 마침내 이성계는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조선을 건국한다. 새로운 국호는 조선(朝鮮), 국왕은 태조로 칭해지며, 개경이 아닌 한양 천도를 염두에 두고 국가 체제를 정비해간다. 하지만 조선의 탄생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구질서의 해체와 신질서의 창조라는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성계는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군사적 배경보다는 이념과 명분, 민생 개혁을 앞세워 정권의 정당성을 세우려 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단순한 영웅을 넘어, 새로운 국가의 창건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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