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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보다,느끼다/오늘의역사

📅 12월 13일 오늘의 역사

by 시넘사 202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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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7호, 달 탐사 종료 및 지구 귀환 시작

📌 오늘의 기념일

  • 몰타 공화국 선포일 (몰타)
    1974년 12월 13일, 몰타는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영연방 왕국 체제를 종식하고 공화국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이는 196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0년 만에 이루어진 주요한 헌법적 변화였습니다. 몰타는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여 오랜 기간 여러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공화국 선포는 완전한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공화국 수립에 따라 몰타의 국가원수는 몰타 의회가 선출하는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는 국가 통합과 국민 주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몰타는 작은 섬나라이지만, 이 날을 통해 식민지배의 잔재를 청산하고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모색하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였습니다. 공화국 선포일은 몰타 국민들에게는 국가 정체성과 자부심을 되새기는 중요한 국경일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 성 루치아 축일 (스웨덴, 이탈리아 등)
    성 루치아 축일은 12월 13일에 기념되며, 주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와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에서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축일은 4세기경 순교한 시라쿠사의 성 루치아를 기리는 날입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는 성 루치아가 빛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어둠이 가장 긴 겨울철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인물로 인식됩니다. 스웨덴에서는 루치아 역할을 맡은 소녀가 하얀 옷을 입고 머리에 촛불 화관을 쓴 채 노래를 부르며 빵과 커피를 제공하는 전통 행사를 거행합니다. 이 행사는 가정, 학교, 직장 등 여러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며, 크리스마스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중심으로 축제가 열리며, 특히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와 유사한 역할로 루치아가 등장하는 지역도 있습니다. 이 축일은 기독교적 전통과 북유럽의 고유한 겨울 축제가 결합된 형태로, 각국의 문화적 특색을 반영하며 전해지고 있습니다.
  • 난징 대학살 희생자 국가 추모일 (중국)
    중국은 2014년부터 12월 13일을 난징 대학살 희생자 국가 추모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고 자행한 대규모 학살 사건이 시작된 날입니다. 약 6주에 걸쳐 수많은 중국인 민간인과 포로가 잔혹하게 학살당하였으며, 여성에 대한 조직적인 성폭행도 광범위하게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정확한 희생자 수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통상적으로 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국 정부는 이 추모일을 통해 난징 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기리며,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국가 추모일에는 난징에서 대규모 기념식이 거행되며, 전국적으로 묵념을 하고 추모 활동을 진행합니다. 이 날은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미래 세대에 역사 교육을 강화하려는 중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날입니다.
  • 프랑스, 마다가스카르 침공 시작 기념일 (프랑스/마다가스카르)
    1883년 12월 13일,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군사 행동인 제1차 프랑스-호바 전쟁(First Franco-Hova War)을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오랜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메리나 왕국의 독립적인 주권 유지를 거부하고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이 날 프랑스군은 마다가스카르의 주요 항구인 투아마시나(Tamatave)를 포격하고 점령하는 것으로 전쟁을 개시했습니다. 이 사건은 마다가스카르의 주권이 위협받기 시작한 중요한 분기점이며, 이후 1895년 제2차 전쟁을 통해 마다가스카르가 완전한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2월 13일은 마다가스카르의 역사에서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그에 따른 저항의 시작점을 상징합니다.
  • 미국 국가 수호 위원회 창설 기념일 (미국)
    1916년 12월 13일, 미국 의회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준비의 일환으로 국가 수호 위원회(National Defense Council)를 창설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당시 미국이 전쟁에 대비하여 산업 및 자원의 동원 체제를 구축하고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위원회는 민간 전문가, 기업가, 노동 지도자 등으로 구성되어, 전시 상황에서 필요한 생산과 자원 배분을 계획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는 미국이 중립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전쟁의 위협에 대비하여 국가 총력전을 준비하는 초기 단계의 조직이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미국이 참전하게 되는 1917년 이후 전시 경제를 관리하고 산업 동원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2월 13일은 미국이 중립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국가 안보와 전쟁 대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 날로 기록됩니다.
  • 폴란드, 계엄령 선포 기념일 (폴란드)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이 이끄는 정부는 전국에 걸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 조치는 당시 폴란드에서 강력한 노동자 운동이자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독립 자주 노동조합 '연대(Solidarity)'의 활동을 탄압하고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계엄령 선포와 함께 연대 노조의 지도자 레흐 바웬사를 포함한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체포 및 구금되었고,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었으며, 언론과 통신이 엄격하게 통제되었습니다. 정부는 이 조치가 사회주의 체제를 보호하고 소련의 군사 개입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계엄령은 1983년 7월에 공식적으로 해제되었으나, 이 기간 동안 폴란드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가 심각하게 제한되었으며, 수많은 인권 침해 사례를 낳았습니다. 이 날은 폴란드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고난과 저항의 상징적인 날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태평양 전기 통신 위원회 창설일 (국제)
    1980년 12월 13일, 태평양 지역의 정보 통신 기술 발전을 논의하고 협력하기 위한 국제 기구인 태평양 전기 통신 위원회(Pacific Telecommunications Council, PTC)가 창설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태평양 연안 국가들과 섬 국가들 간의 통신 네트워크 연결을 강화하고, 정보 교류 및 협력을 촉진하여 지역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PTC는 매년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하여 전기 통신 및 정보 기술 분야의 최신 동향과 정책을 논의하며, 정부, 산업체, 학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중요한 플랫폼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12월 13일은 전 세계 전기 통신 및 정보 기술 분야가 빠르게 발전하던 시기에, 태평양 지역의 연결성 강화와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한 국제적 협력 체계가 구축된 날로 의미를 가집니다.
  • 제10차 남북 장관급 회담 개최일 (한국/북한)
    2002년 12월 13일, 남한과 북한은 평양에서 제10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개최했습니다. 이 회담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정례화된 장관급 협의체의 일환으로, 남북 간의 관계 개선과 교류 협력 사업 추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주요 의제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 방안,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사업 추진, 금강산 관광 활성화, 이산가족 상봉 문제 등이었습니다. 당시 북핵 문제가 재부상하면서 남북 관계가 경색될 위험이 있었으나, 양측은 대화 채널을 유지하고 긴장 완화를 모색하려는 노력을 지속했습니다. 이 회담은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이어가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노력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외교적 이벤트였습니다.

🕰 역사 속 오늘

① 고대~19세기

  • 1545 – 트렌토 공의회 개막 (신성 로마 제국, 이탈리아)
    트렌토 공의회는 1545년 12월 13일, 이탈리아 트렌토(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 도시)에서 개막되어 1563년까지 간헐적으로 지속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19차 세계 공의회입니다. 이 공의회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처한 가톨릭 교회가 내부 개혁과 교리 재정립을 위해 소집한 회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오랜 전통과 교리를 재확인하고, 종교 개혁파의 주장을 반박하며 가톨릭 교회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는 반종교 개혁(Contr-Reformation)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공의회는 성경과 전통을 동등한 권위로 인정하고, 미사 성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성직자들의 기강 확립과 교육 강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개혁 조치를 결정했습니다. 특히 루터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오직 믿음(Sola Fide)' 교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와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트렌토 공의회의 결정은 이후 수백 년간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전례, 조직 운영의 기본 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가톨릭 교회가 내부 결속을 다지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공의회는 또한 성직자들의 거주 의무 강화와 교구 사제의 교육 수준 향상을 위한 신학교 설립 등을 의무화하여 교회 내부의 부패와 비효율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공의회의 결과는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와의 분열 속에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근대 교회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 1642 – 아벨 타스만, 뉴질랜드 발견 (네덜란드)
    1642년 12월 13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항해사이자 탐험가인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현재의 뉴질랜드에 해당하는 땅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명을 받아 미지의 남쪽 대륙을 탐사하던 중 뉴질랜드의 남섬 서해안에 도착하였습니다. 타스만은 이 땅을 자신의 후원자였던 동인도 회사 총독 안토니 반 디멘의 이름을 따서 '스타텐 란트(Staten Landt)'라고 명명했으나, 이후 '네덜란드 해안(Nieuw Zeeland)'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뉴질랜드(New Zealand)'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타스만과 그의 선원들은 해안에 접근하려 했으나, 원주민인 마오리족과의 충돌로 인해 선원 몇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곧바로 철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내륙 탐험이나 상세한 지리 조사는 수행하지 못했으며, 뉴질랜드가 섬인지 대륙의 일부인지조차 명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타스만의 발견은 유럽 세계에 뉴질랜드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제임스 쿡 선장에 의한 본격적인 탐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약 125년간 뉴질랜드는 유럽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타스만의 항해는 호주, 태즈메이니아(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 뉴질랜드 등의 지리적 발견에 기여하며 태평양 탐험의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습니다.
  • 1862 – 프레더릭스버그 전투 발발 (미국)
    프레더릭스버그 전투는 1862년 12월 13일 미국 남북 전쟁 중 버지니아주 프레더릭스버그 근처에서 발발한 주요 전투 중 하나입니다. 북군(연방군)의 앰브로즈 번사이드 소장이 이끄는 포토맥군과 남군(연합군)의 로버트 E. 리 장군이 지휘하는 북버지니아군이 격돌했습니다. 북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남군은 프레더릭스버그 시 외곽의 메리 고지(Marye's Heights)를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전투는 북군에게 참혹한 실패로 기록되었습니다. 북군 병사들은 메리 고지에 위치한 남군의 견고한 진지로 반복적인 정면 공격을 감행했지만, 남군의 집중된 포격과 보병 사격에 막혀 엄청난 사상자를 냈습니다. 특히 남군의 방어선은 돌벽 뒤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북군을 향해 근거리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북군의 전진을 완전히 저지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북군은 약 13,0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남군의 사상자는 약 5,000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압도적인 피해 차이는 북군의 지휘관 번사이드의 무모한 전술 결정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패배는 북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링컨 대통령의 전쟁 수행에 대한 비판을 고조시켰으며, 번사이드 소장은 지휘권을 박탈당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프레더릭스버그 전투는 남군의 사기를 크게 북돋았으며, 로버트 E. 리 장군의 뛰어난 방어 전략과 전술적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한 전투로 기록됩니다.
  • 1883 – 프랑스, 마다가스카르 침공 시작 (프랑스)
    1883년 12월 13일,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첫 번째 본격적인 군사 행동인 제1차 프랑스-호바 전쟁(First Franco-Hova War)을 시작했습니다. 마다가스카르는 당시 메리나 왕국(Hova는 메리나족을 지칭)이 통치하고 있었으며, 프랑스는 섬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오랜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일련의 무역 협정과 조약을 통해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보호국 지위를 주장했으나, 메리나 왕국은 이를 거부하고 독립적인 주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프랑스는 이러한 긴장 상황 속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마다가스카르의 주요 항구인 투아마시나(Tamatave)를 포격하고 점령하는 것으로 전쟁을 개시했습니다. 이 전쟁은 1885년에 메리나 왕국이 프랑스에 일부 영토와 외교적 권한을 양보하는 내용의 조약에 서명하며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 전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하지 못했고, 메리나 왕국은 여전히 내부 통치를 유지했습니다. 이후 프랑스는 1895년에 제2차 프랑스-호바 전쟁을 일으켜 왕궁을 점령하고 메리나 왕국을 멸망시키며 마다가스카르를 완전한 프랑스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12월 13일의 침공 개시는 마다가스카르가 식민지 시대로 접어드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 1888 – 라이언호 참사 발생 (미국)
    1888년 12월 13일, 미국 워싱턴주 해군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증기선 라이언호(SS Rion)에서 대규모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라이언호는 철강으로 건조된 비교적 큰 규모의 선박이었으며, 건조가 거의 완료되어 진수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사고는 선박 내부의 좁은 공간에서 용접 작업이 진행되던 중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용접은 현재와 같은 정교한 기술이 아니었으며, 증기선 내부의 폐쇄된 공간에서는 가연성 물질과 유독 가스가 축적될 위험이 높았습니다. 정확한 사고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각에서는 선박 내부에 인화성 물질이 누출되었거나, 용접 불꽃이 인화성 증기에 인화되면서 폭발 또는 급격한 화재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작업 중이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망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조선소의 안전 규정은 미비했고, 사고 발생 시의 구조 및 대응 시스템 역시 체계적이지 못했습니다. 이 참사는 19세기 후반 미국의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안전 문제와 노동 환경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조선업을 포함한 중공업 분야의 안전 규정 강화 필요성을 대두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1897 – 에밀 졸라, 드레퓌스 사건 규탄 전개 (프랑스)
    1897년 12월 13일,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Émile Zola)는 당시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던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이 시점은 유대인 출신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간첩 혐의로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고 유배된 이후, 사건의 진실에 대한 의혹이 확산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졸라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군부와 정부가 증거를 위조하고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는 사실을 폭로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날을 전후하여 졸라는 프랑스의 지식인들을 규합하고 여론을 움직이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다음 해 1898년 1월 13일, 일간지 '로로르(L'Aurore)'에 발표한 유명한 공개 서한 '나는 고발한다(J'accuse)!'로 이어졌습니다. 이 서한은 프랑스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과 진실 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2월 13일은 졸라가 부패한 권력에 맞서 지식인의 양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를 마무리하던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② 20세기 이후

  • 1917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 협상 시작 (러시아/독일)
    1917년 12월 13일,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와 독일 제국 및 동맹국 간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위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 협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는 10월 혁명 이후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 정부가 평화와 '무병합, 무배상' 원칙을 공약하면서 이 협상에 참여했습니다. 협상은 독일 점령지였던 브레스트-리토프스크(현재 벨라루스)에서 진행되었으며, 볼셰비키 대표단은 외교적 경험이 부족했고 독일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독일은 러시아의 광대한 서부 영토를 요구하며 압박했고, 협상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결국 러시아는 1918년 3월 3일 막대한 영토와 자원을 양보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했습니다. 12월 13일은 러시아가 평화 추구라는 대외 정책을 공식적으로 현실화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러시아 혁명 정부의 운명과 제1차 세계 대전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 1937 – 난징 대학살 시작 (중국)
    1937년 12월 13일은 중일 전쟁 중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날이며, 이 날부터 약 6주에 걸쳐 난징 대학살(Nanking Massacre)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은 난징 점령 후 중국의 군인과 민간인을 상대로 대규모의 조직적인 학살과 강간,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일본군이 도시를 장악한 이후, 수많은 비무장 민간인과 포로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며,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 대학살의 희생자 수는 최소 수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난징 대학살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이 저지른 가장 악명 높은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이 사건은 국제 사회의 큰 비난을 받았으며, 전후 도쿄 국제 군사 재판에서도 주요 전범 행위로 다루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중국과 일본 간의 역사적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중국은 매년 12월 13일을 국가 추모일로 지정하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난징 대학살은 전쟁의 비인간성과 잔혹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이며, 국제법과 인도주의적 가치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 1959 – 마카리오스 3세, 키프로스 초대 대통령 당선 (키프로스)
    1959년 12월 13일, 대주교 마카리오스 3세(Makarios III)가 키프로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마카리오스 3세는 키프로스 독립 운동의 주요 지도자였으며, 영국 식민 통치로부터의 독립과 키프로스 통합을 주장하는 '에노시스(Enosis, 그리스와의 통일)'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당선은 키프로스가 1960년에 공식적으로 독립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독립 후 마카리오스는 키프로스의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 공동체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국가 통합을 이루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두 공동체 간의 갈등은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중립 외교 노선을 추구하며 비동맹 운동에 참여하는 등 국제적 입지를 다지려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들의 반발과 그리스 군사 정권의 개입 시도로 인해 끊임없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974년 그리스 군사 정권이 지원한 쿠데타로 인해 일시적으로 축출되었으나, 이후 국제 사회의 도움으로 복귀했습니다. 마카리오스 3세는 키프로스 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로, 키프로스 독립과 공화국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 1972 – 아폴로 17호, 달 탐사 종료 및 지구 귀환 시작 (미국)
    1972년 12월 13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아폴로 17호의 달 착륙선 챌린저호가 달 표면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달 궤도선으로 복귀했습니다. 아폴로 17호는 미국 아폴로 계획의 마지막 유인 달 탐사 임무였습니다. 12월 7일에 발사된 이 임무는 지질학자 해리슨 슈미트(Harrison Schmitt)가 탑승한 유일한 아폴로 임무로, 달의 타우루스-리트로우 계곡(Taurus-Littrow Valley)에 착륙하여 광범위한 과학 조사를 수행했습니다. 승무원들은 달 표면에서 약 75시간을 보내면서 수백 킬로그램의 달 암석과 토양 샘플을 채취하고, 여러 과학 실험을 설치했습니다. 달 착륙선이 달 궤도선과 도킹하여 지구로의 귀환을 시작한 것은 아폴로 계획의 마지막 유인 달 탐사가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아폴로 17호는 인류가 달 표면에 발을 디딘 마지막 임무로 남아 있으며, 이 임무를 통해 수집된 데이터와 샘플은 달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달 탐사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이 임무의 성과는 이후의 우주 탐사 계획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1981 – 폴란드, 계엄령 선포 (폴란드)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이 이끄는 정부는 전국에 걸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 조치는 당시 폴란드에서 강력한 노동자 운동이자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독립 자주 노동조합 '연대(Solidarity)'의 활동을 탄압하고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계엄령 선포와 함께 연대 노조의 지도자 레흐 바웬사를 포함한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체포 및 구금되었고,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었으며, 언론과 통신이 엄격하게 통제되었습니다. 정부는 이 조치가 사회주의 체제를 보호하고 소련의 군사 개입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계엄령은 폴란드 국민들의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했으며, 수많은 인권 침해 사례를 낳았습니다. 계엄령은 1983년 7월에 공식적으로 해제되었으나, 연대에 대한 탄압과 정치적 통제는 지속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중앙유럽 공산주의 체제의 마지막 주요 억압 행위 중 하나로 기록되며, 폴란드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 2001 – 인도 의회 피습 사건 발생 (인도)
    2001년 12월 13일,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인도 국회의사당 건물에 무장 괴한들이 침입하여 총격전을 벌인 테러 공격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5명의 무장 괴한이 국회의사당 경내로 진입하려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경비대와 경찰 병력과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공격으로 보안 요원 6명을 포함하여 총 9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으며, 5명의 테러리스트 전원이 현장에서 사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인도의 민주주의와 주권을 상징하는 심장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간주되어 인도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인도 정부는 이 공격의 배후로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이슬람 무장 단체를 지목했으며, 이는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사건은 테러리즘에 대한 인도의 경각심을 높이고, 국가 안보 시스템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2월 13일의 의회 피습 사건은 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심각한 테러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 2003 – 사담 후세인 체포 (이라크)
    2003년 12월 13일, 이라크 전쟁 발발 이후 도주 중이던 이라크의 전 대통령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이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고향 근처 티크리트 외곽의 은신처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2003년 4월 바그다드가 함락된 이후 종적을 감췄으며, 미군은 그를 찾기 위해 대규모 수색 작전을 펼쳤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땅속에 숨겨진 좁고 비위생적인 은신처에서 발견되었으며, 체포 당시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체포는 이라크 전쟁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으며, 미국과 동맹국들에게는 큰 승리로 여겨졌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체포는 이라크의 저항 세력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이라크 내의 폭력 사태와 저항 운동을 완전히 종식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사담 후세인은 재판을 받았으며, 2006년 11월에 인류에 대한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같은 해 12월 30일에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체포는 이라크의 정치적 전환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독재 정권의 종식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 2018 – 한국, 동해 '광개토대왕함' 일본 초계기 갈등 발생 (한국/일본)
    2018년 12월 13일, 동해 공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 소속의 광개토대왕함(DDH-971)이 조난 선박을 구조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중,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P-1 초계기가 광개토대왕함에 근접 비행하면서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일본 측은 광개토대왕함이 초계기를 향해 사격 통제 레이더(STIR, Fire-Control Radar)를 조사(照射)했다고 주장하며 한국에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사격 통제 레이더 조사는 무기 발사 전 단계로 간주될 수 있어 군사적 위협 행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반면, 한국 국방부는 광개토대왕함이 조난 선박 수색을 위한 레이더(MW08)만 운용했을 뿐, 사격 통제 레이더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고 반박했습니다. 한국은 일본 초계기가 구명 활동 중인 한국 군함에 저고도 근접 비행을 한 것은 비신사적인 행위이자 위험한 도발 행위였다고 지적하며 일본 측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이 사건은 한일 양국의 군사적 갈등을 고조시키고 외교적 마찰을 빚었으며, 양국 간의 신뢰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양측은 각각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영상 자료를 공개하며 대립했으나, 진실 공방은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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