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반란의 배경: 10.26과 권력 공백
1) 박정희 서거와 권력의 진공 상태 (1979년 10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서거하면서 18년간 지속된 유신 독재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국가는 비상계엄령 하에 놓였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및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최규하 정부는 사실상 과도 정부에 불과했으며, 군과 정보기관 등 핵심 권력 기관들은 중심을 잃은 채 내부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2) 사건 수사의 주도권: 보안사령관 전두환
10.26 사건의 수사는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직한 **전두환 육군 소장(보안사령관)**에게 맡겨졌습니다. 전두환은 수사 과정에서 방대한 정보망과 수사 권한을 이용해 군부 내외부의 정보를 장악하고,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과 기존 군 수뇌부를 견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키웠습니다. 수사 초기부터 수사 범위를 김재규의 개인적 행동을 넘어 군부와 정치권 인사들에게 확대하며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3) 군부 사조직 '하나회'의 존재
반란의 핵심 주역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라는 육군사관학교(육사) 출신 장교들의 사조직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 결성된 하나회는 주로 **육사 11기(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후배 기수들(김복동, 허삼수, 허화평 등)을 규합하여 비공개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들은 군내 요직에 진출하여 조직적으로 권력을 키워왔으며,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암묵적인 비호를 받았습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비롯한 기존 군 수뇌부는 하나회의 존재와 폐해를 인지하고 이를 해체하려 했으나, 이 움직임은 전두환에게는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위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2. 💣 반란의 전개: 1979년 12월 12일의 긴박했던 9시간
1) 정승화 총장 체포 계획과 실행 (19:00~)
신군부는 정승화 총장이 10.26 사건과 관련하여 김재규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으며, 사건 배후를 은폐하려 했다는 '혐의'를 조작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최규하 대통령의 정식 재가** 없이 총장을 불법 연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2월 12일 저녁 7시경, 합수부 소속 병력(특전사 3공수여단 15대대 등)이 서울 한남동 육군 총장 공관에 들이닥쳐 총장을 연행하려 했습니다. 총장 경호원들과 연행 병력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경호원 일부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정승화 총장은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체포되어 보안사로 연행되었습니다.
2)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무력화 (21:00~)
정 총장의 연행 소식이 알려지자, 장태완 소장(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소장(특수전사령관) 등 **정통 군 지휘부**는 이를 '하극상'이자 '군사반란'으로 규정하고 즉각적인 진압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미 치밀한 병력 이동 계획을 실행에 옮긴 상태였습니다.
- **주요 병력 동원:** 노태우 소장이 지휘하는 **9사단**의 29연대와 30연대 병력 일부가 김포와 고양에서 서울로 이동했습니다. 황영시 소장의 **1군단** 일부 병력도 동원되었습니다.
- **진압군 병력의 차단:** 신군부는 최전방에 위치한 주요 사단의 병력을 빼내오는 과정에서 **국방부 장관(노재현)**과 **합참의장** 등의 승인을 위조하거나 무시했습니다. 특히, 수도경비사령부의 헌병대를 무력화시켜 진압군 측의 정보와 명령 전달을 방해했습니다.
- **국방부/육본 충돌:** 장태완 사령관이 진압을 위해 출동시킨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병력과 신군부 측 병력(주로 특전사 병력)이 국방부와 육군본부 건물 주변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통 군 지휘부의 주요 지휘관들이 체포되거나 무장 해제되었습니다.
3) 대통령 재가 강요: 반란의 형식적 완성 (23:00~ 익일 04:00)
총장을 체포한 신군부의 전두환, 노태우 등은 총장의 체포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사후 승인(재가)**을 얻기 위해 압력을 가했습니다. 대통령이 연행 재가를 승인해야만 이 사건이 군 내부의 합법적인 사법처리로 포장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 대통령은 합법적인 절차를 고수하며 국방부 장관의 정식 보고와 재가를 요구하며 버텼습니다. 새벽까지 계속된 긴 대치 끝에, 신군부 측의 강압과 협박(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이미 피신한 상태) 속에서 최 대통령은 결국 13일 새벽 5시경 정승화 총장 연행을 재가했습니다. 이 재가로 군사반란은 형식적으로 **'합법적인 군 내부의 하극상적 사법처리'**로 위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3. 📉 반란의 결과: '서울의 봄'의 종언과 신군부 정권 수립
1) 권력의 장악과 군 수뇌부 숙청
12.12 군사반란 직후,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은 군부 내의 반대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등 반란 진압을 시도했던 핵심 지휘관들은 모두 불명예 전역을 당하거나 구금되었습니다. 하나회는 군의 요직을 독점하며 군 지휘 체계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며 막강한 정보력과 군권을 모두 휘두르는 실세로 등극했습니다.
2) '서울의 봄'의 종언과 민주화 요구의 좌절
10.26 이후 국민들이 기대했던 **민주화**의 열망은 12.12 반란으로 인해 짓밟혔습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 헌정으로의 복귀를 요구하는 국민적 목소리를 철저히 묵살했습니다.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민주화 요구는 1980년 5월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으로 이어지며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3) 제5공화국 수립과 역사적 평가
전두환은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을 사퇴시키고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981년 제12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하며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습니다. 12.12 군사반란은 불법적인 무력 사용으로 정권을 찬탈한 행위로, 1997년 대법원에 의해 **'군사반란죄'**로 최종 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 질서를 유린한 명백한 범죄 행위로,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단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4. 12.12,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12.12 군사반란은 단순한 하극상이 아닌, 군부 사조직이 정치적 공백을 틈타 국가의 권력을 무력으로 탈취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남긴 상처와 역사적 교훈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군은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수호해야 한다는 헌법적 가치를 되새기며, 다시는 무력에 의한 권력 찬탈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역사의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국민들이 쟁취한 민주화는 12.12와 5.18과 같은 비극을 극복하고자 했던 열망의 결과였습니다. 12.12 군사반란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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