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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보다,느끼다/오늘의역사

📅 12월 6일 오늘의 역사

by 시넘사 2025.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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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제도 폐지

📌 오늘의 기념일

  • 핀란드 독립기념일 (핀란드)
    핀란드가 1917년 12월 6일에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핀란드는 19세기 초부터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특히 180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의 결과로 스웨덴으로부터 러시아로 할양된 후, 핀란드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자치를 인정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제국이 붕괴하자, 핀란드 의회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독립을 추진하였습니다. 1917년 12월 6일, 핀란드 의회는 독립 선언서를 채택하였고, 이후 여러 국가로부터 승인을 받았습니다. 독립 직후에는 내전이 발생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공화국 체제를 확립하고 안정화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날은 핀란드 국민에게 매우 중요한 국경일로, 전국적으로 기념식이 열리고 국기가 게양되며, 저녁에는 촛불을 켜는 전통이 있습니다. 핀란드의 독립은 북유럽의 지정학적 상황과 러시아 제국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독립을 통해 핀란드는 독자적인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 스페인 제헌절 (스페인)
    스페인의 민주주의 역사를 상징하는 1978년 스페인 헌법의 국민투표 통과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정권이 1975년에 종식된 후, 스페인은 민주주의로의 전환 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습니다. 1977년 스페인 총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회는 헌법 초안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고, 오랜 논의와 협의 끝에 1978년 헌법 초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헌법 초안은 1978년 12월 6일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스페인 국민 대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되었습니다. 1978년 헌법은 스페인을 입헌군주제 국가로 규정하고, 권력 분립, 기본권 보장, 지방 자치 확대 등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확립하였습니다. 이 헌법의 통과는 스페인의 평화로운 민주주의 이행을 상징하며, 독재 시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 국가를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헌절은 스페인 전역에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스페인 의회에서 공식 기념행사가 개최되어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집니다.
  • 성 니콜라우스 축일 (다국적)
    4세기 경 소아시아의 미라(Myra) 지역의 주교였던 성 니콜라우스(Saint Nicholas)를 기리는 기독교의 축일입니다. 니콜라우스 성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몰래 자선을 베풀었던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어린이와 선원, 상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자선 행위 중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가난하여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 매춘부가 될 위기에 처한 세 자매에게 몰래 금 주머니를 던져 넣어주어 그들의 삶을 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훗날 성탄절의 산타클로스 전설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축일인 12월 6일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 특히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등지에서 어린이들이 선물을 받는 전통이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신터클라스'(Sinterklaas)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스페인에서 배를 타고 와서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립니다. 이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축제 중 하나이며,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문화적 전통을 담고 있습니다.
  • 핼리팩스 대폭발 기념일 (캐나다)
    1917년 12월 6일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 항구에서 발생한 대형 폭발 사고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에서 폭발물을 싣고 가던 프랑스 화물선 '몽블랑(Mont-Blanc)'호가 벨기에 구호선 '이모(Imo)'호와 충돌하면서 발생하였습니다. 몽블랑호에 실려 있던 TNT, 피크르산, 면화약 등의 고성능 폭약이 폭발하면서 핼리팩스 시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폭발은 역사상 인공 폭발 중 가장 강력한 폭발 중 하나로 기록되며, 약 2천 명이 사망하고 9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폭발 지점 근처의 건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충격파는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감지되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핼리팩스 시와 캐나다 해양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매년 12월 6일에는 핼리팩스 시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재난의 교훈을 되새기는 기념 행사가 열립니다. 특히 사고 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시가 신속하게 의료진과 구호 물품을 지원한 것에 대한 감사 표시로, 핼리팩스 시는 매년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스턴 시에 선물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 노동조합 결성의 날 (미국)
    1886년 12월 6일, 미국의 노동조합 연합체인 미국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이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결성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AFL은 당시 미국 노동 운동의 주류였던 기사단 조직인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이 쇠퇴하는 가운데, 숙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습니다. AFL은 개별 직업별 노동조합들의 연합체 형태로, 주로 임금, 노동 시간, 작업 환경 등 실질적인 노동 조건 개선에 초점을 맞춘 경제적 조합주의 노선을 채택하였습니다. AFL의 결성은 미국 노동 운동의 방향을 전문직 및 숙련 노동자 중심의 조합주의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AFL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노동 단체로 성장하였고, 1955년에는 산업별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별 조직 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CIO)와 통합하여 AFL-CIO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이 날은 미국 노동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노동 단체의 결성을 되새기고,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한 노력을 기억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 국가비상사태 선포 기념일 (대한민국)
    1971년 12월 6일,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국가 안전보장에 관한 특별 조치법'과 함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사건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 증대와 미국 등 해외 국가의 방위 공약 축소 등을 이유로 들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습니다. 이 선포를 통해 정부는 국방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행정, 사법, 입법에 걸친 초헌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였습니다. 특히 경제 건설과 국방 강화를 명분으로 하여, 노동 쟁의와 집단적인 시위 및 정치 활동 등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였습니다. 이는 이후 1972년 10월 유신 체제 수립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국가비상사태 선포는 국가 안보의 필요성과 민주적 기본권 제한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을 낳았으며, 대한민국의 현대 정치사에서 권위주의적 통치가 강화되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됩니다. 이 날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시련과 도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 바브리 마스지트 폭파 사건 기념일 (인도)
    1992년 12월 6일,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아요디아 시에 위치했던 이슬람 사원인 바브리 마스지트(Babri Masjid)가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폭파된 사건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사원은 16세기 무굴 제국 시대에 건설되었는데, 힌두교도들은 이 자리가 힌두교의 신 라마의 탄생지 위에 세워진 것이라 주장하며 오랫동안 종교적 갈등의 대상이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힌두교 민족주의 운동이 거세지면서 사원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라마 사원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1992년 12월 6일, 수십만 명의 힌두교 시위대가 모여 사원을 에워쌌고, 결국 사원을 파괴하는 폭력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인도 전역에 걸쳐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대규모 폭동을 유발하였으며,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브리 마스지트 폭파 사건은 인도의 세속주의와 종교 간 화합에 큰 상처를 남긴 역사적 사건으로, 현재까지도 인도 사회의 종교 및 정치적 분열의 주요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날은 종교 갈등과 폭력의 비극을 되새기고 화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 콜롬비아 바나나 학살 기념일 (콜롬비아)
    1928년 12월 6일, 콜롬비아 마그달레나 주 시에나가 마을에서 발생한 노동자 학살 사건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사건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의 바나나 농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더 나은 임금과 노동 환경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자, 콜롬비아 정부군이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최소 임금 보장, 의료 서비스 제공, 일요일 휴무 등 합당한 요구 사항을 내걸었으나, 회사는 이를 거부하고 정부에 군사 개입을 요청하였습니다. 콜롬비아 정부는 노동자들을 공산주의 선동가로 몰아세우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에나가 기차역 광장에 모여 있던 파업 노동자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수십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사망하였으며,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바나나 학살은 콜롬비아 역사에서 외국 자본의 영향력과 국가 폭력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으며, 콜롬비아 문학과 정치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 역사 속 오늘

① 고대~19세기

  • 1352년 – 교황 클레멘스 6세 선종 (교황령)
    1352년 12월 6일, 제198대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아비뇽에서 선종하였습니다. 클레멘스 6세는 1342년에 교황으로 즉위하였으며, 본명은 피에르 로제 드 보포르(Pierre Roger de Beaufort)입니다. 그의 재임 기간은 교황청이 이탈리아 로마가 아닌 프랑스의 아비뇽에 위치했던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시기에 해당합니다. 클레멘스 6세는 프랑스 출신으로, 프랑스 왕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호화로운 생활과 예술 및 학문에 대한 후원으로 유명하였으며, 교황청의 재정 확충에 힘썼습니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중 유럽을 휩쓴 흑사병(Black Death)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는 흑사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고, 특히 유대인들이 흑사병을 퍼뜨린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박해받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칙령을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루트비히 4세와 대립하였으며, 이탈리아 로마의 공화정 수립 시도에 강경하게 대응하였습니다. 클레멘스 6세는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아비뇽 유수의 상황으로 인해 교황권의 약화와 세속 권력의 간섭이라는 이중적인 과제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는 1352년 12월 6일 선종할 때까지 아비뇽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선종은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후임 교황들은 로마 복귀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게 됩니다.
  • 1777년 – 프랑스, 미국 독립 승인 (프랑스)
    1777년 12월 6일, 프랑스 왕국이 미국 독립 전쟁 중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미국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첫 번째 국가가 되었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은 1775년에 시작되었으며, 1776년 미국은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신생 독립국인 미국에게는 유럽 열강의 지지와 군사적, 경제적 지원이 절실하였습니다. 당시 영국과 오랜 경쟁 관계에 있던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 영국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습니다. 특히 1777년 10월 새러토가 전투에서 미국군이 영국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프랑스는 미국의 승리 가능성을 확신하고 공식적인 승인을 결정하였습니다.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778년 2월에는 동맹 조약과 통상 조약을 미국과 체결하였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막대한 규모의 군사적 지원과 재정적 원조를 미국에 제공하였습니다. 프랑스의 개입은 미국 독립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프랑스 해군과 육군의 지원 덕분에 미국은 영국군을 더욱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으며, 이는 결국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의 승리와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한 미국의 최종 독립 승인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의 공식 승인은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주권 국가로 인정받는 중요한 첫걸음이었습니다.
  • 1865년 – 미국 수정 헌법 제13조 비준 (미국)
    1865년 12월 6일,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가 비준되어 미국 전역에서 노예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수정 헌법 제13조는 "미국이나 그 관할권이 미치는 어떤 장소에서도 노예 제도나 비자발적인 복종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 범죄에 대한 처벌로서의 경우는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지속된 남북 전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 중 하나입니다. 남북 전쟁은 노예 제도 유지 여부를 둘러싼 남부 주와 북부 주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며, 전쟁 중이던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선언은 남부의 반란 주에만 적용되는 행정 명령이었으므로, 미국 전체에서 노예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이 필요하였습니다. 1865년 1월 의회에서 수정 헌법 제13조가 통과된 후, 같은 해 12월 6일 필요한 주들의 비준을 받아 공식적으로 발효되었습니다. 이 수정 조항의 비준은 미국 역사에서 인권과 평등의 측면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며,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 자유를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노예 제도의 법적 종식은 미국의 재건 시대와 민권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 1877년 – <워싱턴 포스트> 창간 (미국)
    1877년 12월 6일,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에서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가 창간되었습니다. 이 신문은 스타일스와 허친슨(Stilson Hutchins and his partner)에 의해 창간되었으며, 처음에는 4페이지짜리 저녁 신문으로 발행되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창간 초기부터 정치와 정부 소식에 중점을 두었으며, 수도의 정치 상황에 대한 심층적인 보도를 통해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창간 후 몇 차례의 소유권 변동과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20세기 들어 워싱턴 D.C.의 유력 신문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특히 20세기 후반에는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e Graham)과 벤 브래들리(Ben Bradlee) 편집장의 리더십 아래, 1970년대 초의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 보도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가 주도한 워터게이트 보도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냈으며, 언론의 권력 감시 역할에 대한 상징적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현재까지도 <뉴욕 타임스>와 함께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일간지 중 하나로 평가되며, 국내외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심도 있는 보도로 명성이 높습니다. 이 신문의 창간은 미국의 언론 역사와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 1886년 – 미국노동연맹(AFL) 결성 (미국)
    1886년 12월 6일, 미국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이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공식적으로 결성되었습니다. AFL은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를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노동 단체들이 모여 만든 노동조합의 연합체입니다. 당대 미국 노동 운동의 주류를 이루던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이 급격한 성장과 더불어 내부적인 갈등과 폭력적인 이미지로 인해 쇠퇴하자, 숙련된 직종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AFL은 각 직종별 숙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연맹체로, 주로 임금 인상, 노동 시간 단축, 작업 환경 개선 등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경제적 요구 사항에 집중하는 '순수하고 단순한 조합주의' 노선을 채택하였습니다. 이는 광범위한 사회 개혁을 목표로 했던 노동기사단과는 차별화되는 접근 방식이었습니다. AFL은 정치적으로는 특정 정당에 얽매이지 않고, 노동자의 권익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을 후원하는 실용적인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AFL의 결성은 미국 노동 운동의 판도를 바꾸고,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 노동 운동의 주류 세력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55년에는 산업별 조직 회의(CIO)와 통합하여 AFL-CIO를 결성하게 됩니다.

② 20세기 이후

  • 1917년 – 핼리팩스 대폭발 발생 (캐나다)
    1917년 12월 6일,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 항구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인공 폭발 사고 중 하나인 핼리팩스 대폭발이 발생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수품을 실은 프랑스 화물선 '몽블랑(Mont-Blanc)'호가 네덜란드 구호선 '이모(Imo)'호와 충돌하였습니다. 몽블랑호는 약 2,900톤의 고성능 폭약(TNT, 피크르산, 면화약 등)을 싣고 있었으며, 충돌로 인한 화재가 폭약에 인화되어 대규모 폭발로 이어졌습니다. 폭발로 인해 발생한 충격파는 반경 2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것을 파괴하였고, 도시 전체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사고로 약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즉사하거나 부상으로 사망하였으며, 9,0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폭발은 또한 거대한 쓰나미를 발생시켜 해안 지역에 추가적인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핼리팩스 시와 주변 지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사고 직후 미국 보스턴 시를 포함한 국제적인 구호 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핼리팩스 대폭발은 인류가 경험한 비핵 인공 폭발 중에서도 그 파괴력과 희생자 규모 면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 1921년 – 영국-아일랜드 조약 체결 (영국/아일랜드)
    1921년 12월 6일,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인 신 페인(Sinn Féin) 대표단 사이에 영국-아일랜드 조약(Anglo-Irish Treaty)이 런던에서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지속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아일랜드 섬의 남부 26개 주를 포함하는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을 영국 연방 내의 자치령(Dominion)으로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캐나다, 호주 등과 유사한 지위를 부여받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약에는 북아일랜드 6개 주가 영국에 잔류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아일랜드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또한, 아일랜드 자유국의 의원들은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 선서를 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아일랜드 내부에서도 큰 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조약의 체결은 아일랜드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찬반양론을 낳았고, 결국 조약에 반대하는 세력과 찬성하는 세력 간의 내전(Irish Civil War)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은 아일랜드가 독립 국가로 나아가는 역사적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아일랜드 공화국 수립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 1950년 – 한국 전쟁, 평양 재점령 (북한/대한민국)
    1950년 12월 6일, 한국 전쟁 중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하고, 북한군이 평양을 재점령하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는 북한 정권을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는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 10월 말부터 대규모의 중공군이 한반도에 개입하면서 전황은 다시 급변하였습니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전면적인 후퇴를 결정하였고, 이 과정에서 평양을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2월 4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12월 6일 평양은 북한군에게 다시 넘어갔습니다. 이 평양 철수는 한국 전쟁의 흐름을 다시 교착 상태로 몰고 간 중요한 군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38선 이남으로 후퇴하며 전선을 재정비하였고,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고착화되어 장기간의 소모전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평양 재점령은 중공군 개입의 위력을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자, 한국 전쟁의 장기화와 분단의 고착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 1979년 – 최규하 대통령 취임 (대한민국)
    1979년 12월 6일, 최규하 국무총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취임하였습니다. 이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10.26 사건' 이후 발생한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선포된 유신 체제 하에 있었습니다. 유신 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 선거가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간접 선거 기관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국무총리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보궐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유신 체제를 종식하고 민주적인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취임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고, 실질적인 권력은 그로부터 불과 엿새 뒤인 12월 12일에 발생한 신군부의 군사 반란(12.12 사태)을 통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에게 넘어갔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취임 후 민주화 추진의 기대를 받았으나, 신군부의 압력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사실상 실권 없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가 1980년 8월에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 1992년 – 바브리 마스지트 폭파 사건 (인도)
    1992년 12월 6일,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아요디아 시에 위치한 이슬람 사원인 바브리 마스지트(Babri Masjid)가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폭파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 세기 동안 지속된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종교적 갈등이 폭발한 결과였습니다. 힌두교도들은 이 사원 부지가 자신들의 신인 라마의 탄생지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하며, 사원 철거와 라마 사원 재건을 요구하였습니다. 사건 당일, 힌두교 민족주의 단체가 조직한 대규모 시위대가 사원 주변에 모였고, 경찰의 통제를 무시하고 사원 안으로 난입하여 사원을 파괴하였습니다. 이 폭파 사건은 인도 전역에 걸쳐 힌두교와 이슬람교 공동체 간의 유혈 폭동을 촉발하였으며, 수천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는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인도의 세속주의 국가 정체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종교적 극단주의의 위험성을 국제 사회에 각인시켰습니다. 인도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긴장 완화와 공동체 간 화해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해당 부지를 둘러싼 법적 분쟁은 2019년 인도 대법원의 판결이 나올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중요한 종교 갈등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 2020년 – 하야부사 2 지구 귀환 (일본)
    2020년 12월 6일, 일본의 우주 탐사선 하야부사 2호가 소행성 류구(Ryugu)에서 채취한 표본을 담은 캡슐을 지구로 귀환시켰습니다. 하야부사 2호는 2014년 12월에 발사되어, 2018년 6월 소행성 류구에 도착하였습니다. 류구는 태양계 초기 물질을 보존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C형 소행성으로, 생명체의 기원과 태양계 형성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하야부사 2호는 류구 표면에 두 차례 착륙하여 표면 물질과 지하 물질을 채취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특히 인공 충돌체를 사용하여 지하 물질을 노출시키는 실험은 세계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2019년 11월 류구를 떠난 하야부사 2호는 2020년 12월 6일 오스트레일리아 사막 상공에서 표본이 담긴 캡슐을 분리하여 성공적으로 지구에 착륙시켰습니다. 캡슐에서 회수된 소행성 표본은 지구의 물과 유기물의 기원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표본의 성공적인 귀환은 일본의 우주 탐사 기술력을 전 세계에 입증하였으며, 소행성 탐사 분야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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