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기념일
- 6·10민주항쟁 기념일 (대한민국)
1987년 6월 10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대규모 국민 시위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6·29 선언을 이끌어내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포르투갈의 날 (포르투갈)
1580년 국민 시인 루이스 지 카몽이스의 사망일을 기념하여 제정된 국경일입니다. 포르투갈 본토뿐 아니라 해외 포르투갈 공동체가 문학과 문화를 기리며 기념행사를 엽니다. - 알코올익명모임 설립 기념일 (미국)
1935년 오하이오주 애크런에서 음주 문제 극복을 위한 자조 모임이 처음 조직되었습니다. 이후 전 세계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회복 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 소유즈멀티필름 창립기념일 (소련)
1936년 창립된 러시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체부라시카’ 등 소련 시대 대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였습니다. 이후 동유럽 애니메이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 국제 마법의 날 (세계)
전 세계 마술사들이 모여 마술 문화를 기념하는 비공식 기념일입니다. 공연과 워크숍 등 관련 행사가 여러 나라에서 진행됩니다.
🕰 역사 속 오늘
고대~20세기 전반
- 1190년 – 프리드리히 1세 익사 (신성로마제국)
제3차 십자군을 이끌던 프리드리히 1세가 살레프 강을 건너다 익사하였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독일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십자군 원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1793년 – ‘마라의 죽음’ 공개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혁명가 마라의 피살 장면을 회화로 발표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기의 상징적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 1829년 – 첫 모터보트 운항 (영국)
스팀 기관을 장착한 모터보트가 템스강에서 최초로 시험 운항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는 수상 교통 기술의 진보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 1865년 – 리히텐슈타인 독립 보장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와의 종속 관계를 종결하고 독립국으로 국제적 인정을 받았습니다. 영세중립국으로서의 지위도 이 시기에 확립되었습니다.
20세기 이후
- 1940년 – 이탈리아 2차 세계대전 참전 (이탈리아)
이탈리아가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하며 독일과 함께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이후 북아프리카와 발칸 전선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 1964년 – 인종차별금지법 통과 (미국)
미국 상원이 공공장소, 고용 등에서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시민권 운동의 대표적 성과로 평가됩니다. - 1967년 – 골란고원 점령 (이스라엘)
6일 전쟁 중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이후 중동 갈등의 핵심 분쟁 지역으로 남게 됩니다. - 1999년 – 코소보 공습 종료 (유고슬라비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을 종료하였습니다. 이후 코소보는 유엔의 임시 통치를 받으며 독립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 2003년 – 화성 탐사선 발사 (유럽연합)
유럽우주국(ESA)이 ‘마스 익스프레스’를 발사하며 화성 탐사에 처음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는 유럽연합의 우주 탐사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 오늘 태어난 위인
- 황병기 (대한민국)
1936년 6월 10일 출생하였습니다. 가야금을 현대음악과 결합하며 한국 전통음악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 모리스 센닥 (미국)
1928년 6월 10일 출생하였습니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유명하며, 아동 문학에 상상력과 심리를 도입한 작가입니다. - 구스타브 쿠르베 (프랑스)
1819년 6월 10일 출생하였습니다. 사실주의 회화를 이끈 인물로, 이상이 아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주목받았습니다. - 오토 니콜라이 (독일)
1810년 6월 10일 출생하였습니다. 오페라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을 작곡한 독일 낭만주의 음악가입니다.
🔎 사건 들여다보기
6·10민주항쟁 – 시민의 항거가 만든 개헌의 길
1. 호헌 조치 발표와 국민적 반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호헌 조치’를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사실상 간접선거제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되었으며, 민주화를 기대하던 국민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겼습니다.
정치권과 재야 단체, 학생 운동권은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역행’으로 규정하고 즉각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조직되어 범국민적 항쟁의 준비를 주도하게 됩니다.
*호헌 조치 =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고, 기존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전두환 정권의 선언입니다.
2.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
같은 해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 끝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경찰은 초기에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허위 발표로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드러나며 사회적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급속히 증폭되었습니다. 박종철은 곧바로 항쟁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고, “우리는 잊지 않는다”는 슬로건이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3. 6월 9일 – 이한열 피격 사건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시위 중 이한열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중태에 빠졌습니다. 현장 사진과 부상 장면은 언론과 대자보를 통해 빠르게 퍼졌고, 국민의 분노는 정점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이한열은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피격은 항쟁의 전국적 확산을 불러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도층 시민들도 본격적으로 항쟁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4. 6·10 국민대회 – 항쟁의 시작
1987년 6월 10일, 국본은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 규명’과 ‘호헌 철폐’를 요구하며 대규모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였습니다. 서울을 비롯해 33개 도시에서 시민과 학생, 노동자들이 동시에 거리로 나섰습니다.
서울 도심에는 20만 명 이상이 운집했고, 연세대학교·서울역·명동성당 등을 중심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경찰은 강경 진압에 나섰으나, 시위대는 전열을 가다듬으며 지속적인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5. 명동성당과 농성의 장기화
명동성당은 시위 참가자들의 피난처이자 항쟁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시민들과 신부, 수도자들은 경찰의 진입을 막으며 연대 농성을 벌였습니다.
이곳에서의 밤샘 집회와 기도, 성명 발표 등은 언론을 통해 확산되었고 전국적인 시위 참여로 이어졌습니다. 종교계와 문화계 인사들도 성명서를 발표하며 항쟁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였습니다.
6. 항쟁의 전국적 확산과 정부의 곤란한 대응
6월 10일부터 시작된 항쟁은 6월 중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부산, 대전, 광주, 대구 등 주요 도시마다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어 국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외신 보도와 교민 사회의 관심도 커졌고, 군 투입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7. 6·29 선언과 항쟁의 마무리
결국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8개 항목의 특별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른바 ‘6·29 선언’으로, 직선제 수용과 정치범 석방, 언론 자유 확대 등을 약속하였습니다.
항쟁은 정부의 공식적인 수용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은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직선제를 실현하게 됩니다. 6월 항쟁은 평화적 집회로 민주 개혁을 이끌어낸 대표적인 시민 운동으로 기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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