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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오늘의역사

📅 6월 12일 오늘의 역사

by 시넘사 2025.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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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 오늘의 기념일

 

필리핀 독립기념일 (필리핀)
1898년 필리핀은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주도 아래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이 날은 필리핀 국민에게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자주 국가로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이후 필리핀은 다시 미국의 영향 아래 들어가며, 진정한 자치 확립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러시아의 날 (러시아)
1991년 러시아 연방 의회는 국가 주권 선언을 통해 독자적인 헌법과 체제를 갖춘 독립 국가로서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 조치는 소련 해체의 전조이자 러시아 현대 국가 탄생의 출발로 간주됩니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이날을 공식 공휴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러버링 데이 / Loving Day (미국)
1967년 미국 대법원은 ‘러빙 대 버지니아’ 사건에서 인종 간 결혼 금지법을 위헌으로 판결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미국 헌법상 평등권 원칙을 재확인하는 판례로 남아 있습니다. 매년 6월 12일은 러버링 데이로 기념되며, 인종과 사랑의 자유를 상징하는 날로 기억됩니다.

헬싱키의 날 (핀란드)
1550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1세는 핀란드 해안에 헬싱포르시타(현 헬싱키)를 설립하였습니다. 전략적 항구도시로 세워진 이 도시는 훗날 핀란드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헬싱키는 행정, 교육, 디자인 중심지로서 국제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아동 노동 반대의 날 (국제)
국제노동기구(ILO)는 아동 노동 근절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6월 12일을 세계 아동 노동 반대의 날로 제정하였습니다. 이날은 노동 현장에 노출된 전 세계 어린이들의 현실을 알리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각국은 이 날을 중심으로 정책 발표와 교육 캠페인을 시행합니다.

한국은행 설립 기념일 (대한민국)
1950년 6월 12일, 대한민국은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자주적인 금융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이는 화폐 발행과 통화 정책 수립의 기틀을 마련한 조치였습니다. 이후 한국은행은 금융시장 안정과 경제 정책 조율의 중추 기관이 되었습니다.

500원 동전 발행일 (대한민국)
1982년 6월 12일, 500원 동전이 처음 발행되어 유통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최고액의 주화로, 실생활에서 고액 거스름돈 사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후 500원 동전은 일상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주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 역사 속 오늘

① 고대 ~ 20세기 전반

910 – 제2차 아우크스부르크 전투 (헝가리·동프랑크)
헝가리군은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4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기동성과 기만 전술을 활용한 이 전투는 당시 헝가리 기병대의 전략적 우위를 입증하는 사례였습니다. 이후 헝가리는 중부 유럽 내 세력 확장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1206 – 델리 술탄국 수립 (인도)
쿠트브 알딘 아이바크는 인도 북부에 이슬람 왕조인 델리 술탄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이는 인도 아대륙에 이슬람 통치가 정착되는 계기였습니다. 이후 델리 술탄국은 무슬림 정권의 중심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240 – 파리 논쟁 시작 (프랑스)
루이 9세의 명령에 따라 유대교 경전 탈무드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열렸습니다. 이 논쟁은 유대교에 대한 종교적 탄압의 형식을 띠고 있었습니다. 논쟁 결과는 유대 문헌 검열과 소각으로 이어졌습니다.

1381 – 영국 농민 반란 (영국)
과중한 조세와 봉건적 억압에 반발한 영국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와트 타일러의 지도 하에 반란군은 런던까지 진입하였으나, 협상 과정에서 지도자가 암살당하며 진압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중세 영국의 신분 질서에 심각한 균열을 남겼습니다.

1418 –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 대학살 (프랑스)
프랑스 내전 중 파리 시민과 부르고뉴파는 아르마냑파 주요 인사들을 대규모로 숙청하였습니다. 이 학살은 정치적 분열이 민간 폭력으로 확산된 대표적 사례로 기록됩니다. 희생자에는 고위 관료와 성직자도 포함되었습니다.

② 20세기 이후

1942 – 안네 프랑크, 일기장 받음 (독일·네덜란드)
열세 번째 생일을 맞은 안네 프랑크는 가족에게서 일기장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2년간 은신처 생활을 기록하게 되었으며, 이 기록은 훗날 《안네의 일기》로 출간됩니다. 해당 일기는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는 중요한 문헌으로 남아 있습니다.

1950 – 한국은행 설립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는 화폐 발행과 금융정책 수행을 위해 한국은행을 공식 설립하였습니다. 이 조치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한국은행은 금융안정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1963 – 메드거 에버스 암살 (미국)
미국 시민권 운동가 메드거 에버스는 미시시피 잭슨 자택 앞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피살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내 인종차별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죽음은 미국 시민권 운동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1964 – 넬슨 만델라 종신형 선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는 리보니아 재판에서 반국가 행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로벤섬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27년간 수감 생활을 견디며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은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부당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7 – Loving v. Virginia 판결 (미국)
미국 대법원은 버지니아 주법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하면서 인종 간 결혼 금지를 폐지하였습니다. 이는 미국 내에서 결혼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 판결은 민권 운동의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1987 – 레이건 베를린 장벽 연설 (미국·독일)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서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에게 장벽 철거를 촉구하였습니다. “이 벽을 허물라”는 연설은 냉전 말기 미국의 대소련 외교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후 2년 뒤 베를린 장벽은 실제로 붕괴됩니다.


🎂 오늘 태어난 위인

안네 프랑크 (독일·네덜란드)
1929년 출생. 유대인 소녀로서 은신처에서 작성한 일기는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의 삶을 증언하는 대표적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녀의 기록은 전 세계 독자들에게 감시와 억압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 있습니다.

조지 H. W. 부시 (미국)
1924년 출생. 제41대 미국 대통령으로, 걸프전 수행과 냉전 종식기 외교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후 유엔과 세계은행 등 국제 무대에서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아드리아나 리마 (브라질)
1981년 출생. 세계적인 패션 모델로, 빅토리아 시크릿의 대표 얼굴로 오랜 기간 활동하였습니다. 그녀는 브라질 출신 모델 중 세계적 성공을 거둔 대표 인물로 평가됩니다.

데이비드 록펠러 (미국)
1915년 출생. 록펠러 가문의 일원으로, 국제 금융과 자선 활동에 광범위하게 참여하였습니다. 록펠러 재단 등을 통해 세계 보건 및 교육 사업에도 지속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 사건 들여다보기

넬슨 만델라 종신형 선고 (1964년 / 남아프리카공화국)

📍 1. 사건의 배경 –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와 ANC의 무장 전환
1948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을 공식화하였습니다. 이는 백인 소수 정권이 흑인 다수 인구를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분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체계였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소속된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초기에 비폭력 저항 운동을 펼쳤지만, 국가의 강경 진압과 법률적 탄압으로 인해 한계에 직면하였습니다.
1961년, 만델라와 동료들은 비폭력 투쟁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무장 투쟁 조직인 **움콘토 웨 시즈웨(Umkhonto we Sizwe)**를 결성하였습니다. 이 조직은 인명 피해를 피하면서 기반 시설을 겨냥한 파괴행위를 시작하였고, 이는 국가전복 혐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1948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시행된 공식적인 인종 분리·차별 정책입니다.


📍 2. 첫 번째 체포 – 1962년의 무단 출국과 5년형
넬슨 만델라는 1962년 8월 5일, 남아공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외국에서 군사 훈련과 지지를 요청하기 위해 출국한 상태였으며, 위장 신분으로 남아공에 돌아온 직후 체포되었습니다. 법원은 그에게 무단 출국 및 불법 선동 혐의를 적용하였고, 5년형이 선고되어 복역을 시작합니다.
이 시점까지는 아직 무장 투쟁이나 파괴 활동에 대한 직접적 재판은 개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ANC 지도부의 은신처에서의 급습이 모든 사건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 3. 리보니아 급습 – 문건 압수와 핵심 인물 체포 (1963년 7월)
1963년 7월 11일, 경찰은 요하네스버그 인근 리보니아 농장을 급습하였습니다. 이곳은 움콘토 웨 시즈웨의 작전 기지로 사용되던 은신처였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다수의 지도급 인물들이 체포되었고, 다량의 문서·무기·작전 계획서가 확보되었습니다.
경찰은 문서 속에 기록된 **‘M-Plan’**이라 불리는 전복 계획을 근거로, 정부 전복 및 폭력 행위 계획 혐의를 적용하였습니다. 이로써 기존의 5년형과는 별도로 만델라를 포함한 11명에 대한 새로운 중대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 4. 재판 개시 – 리보니아 재판의 시작 (1963년 10월)
1963년 10월 9일, 프리토리아 고등법원에서 리보니아 재판(The Rivonia Trial)이 정식 개시되었습니다. 기소 대상은 넬슨 만델라를 포함한 10명이었으며, 검찰은 그들이 “폭력 혁명을 통해 정부를 전복하려 한 혐의”를 주장하였습니다. 피고인들은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으나, 정치적 정당성과 도덕적 근거를 바탕으로 자기 변론에 나섰습니다.
이 재판은 국제적 이목을 끌었고, 유엔과 해외 인권 단체들은 재판 감시를 시작하였습니다. 남아공 정부는 외교적 비난을 의식하면서도 재판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 5. 최후 진술 – 넬슨 만델라의 연설 (1964년 4월 20일)
1964년 4월 20일, 넬슨 만델라는 법정에서 **최후 진술(statement from the dock)**을 직접 낭독하였습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나는 흑인과 백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민주적 이상을 위해 싸웠으며, 필요하다면 이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해당 진술은 피고인의 방어보다는 정치적 신념을 선언하는 발언이었습니다.
이 연설은 이후 역사적으로 중요한 연설문으로 남게 되었으며, 리보니아 재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법정 분위기는 침묵에 가까웠고, 피고인들의 태도는 강경했습니다.


📍 6. 선고 결과 – 종신형 선고 (1964년 6월 12일)
1964년 6월 12일, 재판부는 넬슨 만델라와 그 외 7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사형을 요구하던 검찰과 달리, 판결은 국제 사회의 비판을 의식한 결과로 종신형에 그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선고 직후 만델라를 비롯한 피고인들은 **로벤섬 교도소(Robben Island)**로 이송되어 수감되었습니다.
이날 법정에서는 별도의 발언이나 항의 없이 조용히 판결이 낭독되었습니다. 이후 만델라는 27년 동안 복역하게 되었으며, 재판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억압적 성격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7. 재판의 영향과 역사적 의미
리보니아 재판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내 흑인 민권 운동 지도자들을 장기 수감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전 세계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촉발점이 되었습니다. 재판 기간 중과 이후에 유엔, 영연방, 미국 등 주요 국제사회는 남아공 정부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였습니다.
만델라는 감옥 안에서도 지도자적 위상을 유지하였고, 1990년 석방 후에는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이 재판은 단순한 법적 절차를 넘어, 하나의 체제가 유지되던 방식과 이를 거부하는 인물 간의 충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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