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1418년 8월 18일(세종 즉위년)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행정 체계는 태종 14년 (1414) 육조직계제 시행으로 육조가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구조였습니다. 1422년 6월 8일 태종이 별세하면서 상왕 정치가 종료되자, 세종은 자율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핵심은 의정부의 심사 기능을 복원하여 행정 검증 절차를 강화하는 일입니다. 1436년 4월 12일 교지를 통해 세종은 의정부서사제를 공식 재도입하였고, 이에 따라 육조는 의정부를 거쳐 상주하도록 구조가 전환되었습니다. 본 글은 1418년 즉위부터 1436년 제도 전환까지의 연대별 배경, 추진 과정, 행정 변화를 실록 기록에 근거하여 자세히 설명합니다.
1418년 즉위 당시 행정 상황
1418년 세종이 즉위했을 때 조정은 태종 14년(1414) 도입된 육조직계제에 따라 운영되었습니다. 이 제도 아래에서 육조 판서는 매일 근정전 등 왕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해 군정·재정·인사·형사·예제·공역 업무를 직접 보고했습니다. 의정부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으로 구성된 최고 자문 기구였으나, 문서 심사 권한이 크게 축소된 상태였습니다. 왕권이 실무까지 포괄하면서 보고 속도는 빨라졌지만, 부처 간 정책 충돌을 조정할 상위 합의 절차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상시 제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종실록』 권29에는 “육조의 보고가 번잡하여 판례가 엇갈린다”는 대신들의 탄원이 기록되어 왕권 집중 운영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세종은 즉위 직후 상왕 태종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어 제도 개혁을 미루었으나, 초기부터 다단계 검증 구조의 필요성을 인식했습니다.
개혁 추진 배경
1422년 6월 8일 태종이 승하하여 상왕 정치가 마무리되자 세종은 독자적인 정치 구상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측우기·혼천의 제작, 한글 창제 준비, 여진·왜구 대응 등 다부처 협력이 필수인 국책 과제를 대거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육조직계제 체제에서는 부처별 이해관계 조정과 예산·인사 배분 협의가 늦어졌고, 각 판서의 전문 보고가 병렬로 제출되는 탓에 국왕이 모든 세부 사항을 직접 조정해야 했습니다. 또한 『세종실록』 권39에는 “예·형 양조의 판서가 상충된 안을 올려 의정부가 조정하지 못하니 민원이 발생하였다”는 기사가 있어, 심사 부재가 정책 혼선을 유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종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의정부를 다시 국정 심사 중심으로 세우고, 육조를 집행 기관으로 돌려 행정 검증과 실행의 분업을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1436년 의정부서사제 재도입
세종 18년 4월 12일, 세종은 승정원에 교지를 내려 “이제부터 육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문서를 먼저 의정부에서 삼정승이 합의하여 아뢴 뒤 재가를 받는다”라고 선언했습니다(『세종실록』 권72). 이는 태종 대 이전의 의정부서사제를 복구한 조치로, 왕명 시행 과정이 〈육조 초안 → 의정부 합의 → 국왕 재가〉 3단계로 공식화된 사건입니다. 교지 반포 직후 의정부는 업무 분류·문서 서식·결재 순서를 담은 시행 규정을 마련하여 각 조에 배포했습니다. 세종은 동시에 “군사·재난 등 긴급 상황에는 판서가 별도로 계문하여 상주한다”는 예외 규정을 두어 보고 지연을 최소화했습니다. 이러한 단계적 이행 절차는 『세종실록』 권73·74에 연속 기사로 기록되어, 제도가 단일 조항이 아닌 다수 후속 조처로 완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육조 기능 약화와 변화
의정부서사제 재시행으로 육조는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는 국왕에게 직접 보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판서는 정책 초안을 작성한 뒤 의정부 합의를 받아 재가를 구해야 했고, 의정부 정승들은 해당 문안의 예산 타당성·전례 적합성·조례 상충 여부를 검토했습니다. 이로써 정책 오류 가능성이 감소했고, 부처 간 이해관계 충돌을 정승 합의 단계에서 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종실록』 권82에는 “의정부가 호조·병조의 병량 조달안을 조정하여 변방 수비에 지장이 없게 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제도 효율이 실제로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육조의 정치적 위상은 하향 조정되어 집행 전문 기관으로 성격이 고정되었습니다. 세종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홍문관·집현전을 활용해 정책 연구 기능을 강화하고, 삼사·대간을 활성화하여 의정부‧육조를 견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 관료제는 심사·집행·언론 기능이 분리된 다중 견제 구조로 진화했습니다.
📌 실록 속 결정적 장면
1436년 4월 12일 교지 반포 : “육조의 각 장부는 먼저 의정부에 회부하여 삼정승이 도합(都合)하고 아뢸 것”이라는 세종 교지가 반포되었습니다. 이는 제도 전환을 명문화한 1차 근거 자료입니다.
1436년 4월 24일 시행 규정 반포 : 의정부가 육조에 ‘문서 서식·인장 사용·재가 순서’를 상세히 규정한 시행책문을 배포했습니다(『세종실록』 권72).
1437년 2월 7일 합의 기록 : 의정부가 병조의 변방 경비안을 심사하여 왕에게 올렸으며, 세종이 “정승들이 무겁게 논의하였으니 따르라”라고 재가했습니다(『세종실록』 권75).
🔖 용어 설명표
- 의정부서사제: 육조가 의정부 합의를 거쳐 왕에게 상주하고, 왕명이 시행되는 간접 보고 제도입니다.
- 육조직계제: 육조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여 지시를 받는 직계 보고 제도입니다.
- 정승: 의정부를 구성하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가리키며, 국정 심사·조정 기능을 담당합니다.
- 판서: 육조의 수장으로 각 조의 업무·예산·인사를 총괄하는 관직입니다.
- 계문: 긴급 사안을 왕에게 즉각 보고하기 위해 판서가 올리는 별도 문서 형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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