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를 읽다

🇰🇷 6·25 전쟁 – 한반도를 갈라놓은 전쟁의 서막

by 시넘사 2025. 6. 24.
반응형

 

 

 

목차

  1. 전쟁의 배경
  2. 전쟁 발발과 초기 상황
  3. 주요 전투와 전선 변화
  4. 정전 협정과 전쟁의 종결
  5. 전쟁 이후 한반도에 남은 상흔
  6. 함께 기억해야 할 인물들
  7. 마무리

 

1. 전쟁의 배경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일제의 패망이 결정되자, 한반도는 미·소 간의 냉전 구도 속에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할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주둔하게 되며, 이는 사실상 남북 각각의 정부 수립으로 이어집니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이념의 충돌과 분단된 영토를 둘러싼 갈등은 고조되었고, 결국 한반도는 정식 전쟁으로 비화하게 됩니다.

2. 전쟁 발발과 초기 상황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소련제 전차 T‑34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남침을 시작합니다.

서울 함락 (6월 28일)
단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으며, 정부는 대전 → 대구로 이동합니다.

한강 인도교 폭파
피난민이 탈출하기도 전에 군은 한강철교를 폭파하면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합니다.

3. 주요 전투와 전선 변화

🟥 낙동강 방어선 (8월~9월)
미군과 국군은 부산과 대구 일대를 마지막으로 지키며 낙동강 전선을 구축합니다. 당시 '부산까지 뚫리면 끝'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어 전세가 역전됩니다. 국군은 서울을 재탈환하고, 북한으로 진격해 나갑니다.

🟥 압록강까지 진격
북진은 압록강 근처까지 이어졌으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급속히 밀려납니다.

🟨 서울 재함락과 1.4 후퇴 (1951년 1월)
1951년 1월, 서울은 다시금 북한·중국군에 점령당하고, 국군은 대대적인 후퇴를 겪습니다.

🟩 전선 교착 (1951~1953)
이후 전선은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화되며, 참호전을 중심으로 한 소모전이 이어집니다.

4. 정전 협정과 전쟁의 종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전투는 종료됩니다.

그러나 이는 ‘휴전’이지 ‘종전’이 아니며,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 상태입니다.

정전선은 38선이 아닌, 실제 교전선 기준의 군사분계선(MDL)으로 설정되며, 비무장지대(DMZ)가 양측을 가릅니다.

5. 전쟁 이후 한반도에 남은 상흔

사망자 및 실종자: 약 300만 명 이상 (민간인 포함)
이산가족 발생: 수십만 가족이 생이별
전국 토지의 1/3 이상 파괴
한국 사회의 전면적 재건 필요
전쟁 이후,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와 산업화에 나서게 되며, 북한은 소련·중국의 지원을 통해 중앙집권적 체제를 굳혀갑니다.

6. 함께 기억해야 할 인물들

인물 역할
이승만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낙동강 방어선 유지와 북진 강조.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전쟁을 주도함.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인천상륙작전 성공 주역.
백선엽 대한민국 국군 장군. 낙동강 전선 사수와 북진 주도.
중국 인민지원군 중국의 대규모 개입으로 전쟁 판도를 바꿈.

7. 마무리

6·25 전쟁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북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평화체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 전쟁은 단지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오늘날의 안보와 정치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역사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