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기념일
- 세계 난민의 날 (국제)
유엔은 2001년부터 6월 20일을 세계 난민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1951년 난민협약 채택 50주년을 기념하여 지정되었습니다. 전 세계 난민의 현실을 알리고 인권 보호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계기가 됩니다. - 국제 아이스크림 소다의 날 (국제)
6월 20일은 미국과 일부 국가에서 아이스크림 소다의 즐거움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탄산음료에 아이스크림을 더한 이 음료는 여름철 대표적인 디저트로 인식됩니다. 이날을 맞아 일부 카페와 매장에서 특별 메뉴를 제공합니다. - 세계 생산성의 날 (국제)
이 날은 국제기구와 산업계에서 업무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을 주제로 다양한 행사를 여는 날입니다. 생산성 향상은 경제 성장과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핵심 과제로 간주됩니다. 주로 연구 발표와 세미나를 통해 정보가 공유됩니다.
🕰 역사 속 오늘
① 고대~19세기
- 451 – 카탈라우눔 전투 (로마 제국)
로마 제국과 서고트 연합군이 훈족의 아틸라와 충돌한 전투입니다. 전투 결과 아틸라가 철수하면서 로마는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습니다. 이 전투는 유럽 서부 방어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간주됩니다. - 1180 – 제1 우지역 전투 시작 (일본)
겐페이 전쟁의 시작점으로 평가되는 전투입니다. 헤이시와 겐지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며 무사 정치 체제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이후 일본 무사 정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1756 – 캘커타 블랙홀 사건 (영국·인도)
인도 벵골에서 영국군 포로들이 좁은 공간에 감금되어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입니다. 약 140여 명이 수용된 감방에서 대부분이 질식사하거나 탈수로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의 인도 지배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② 20세기 이후
1942 – 아우슈비츠 탈주 사건 (폴란드)
4명의 수감자가 SS 제복을 위조하고 차량을 훔쳐 탈출했습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탈출 계획을 세웠으며 일부는 레지스탕스와 합류했습니다.
이 사건은 수용소 내 저항과 외부 연결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평가됩니다.
1948 – 서베를린 봉쇄 시작 (독일)
소련은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도로, 철도, 수로를 모두 차단하며 봉쇄를 시작했습니다.
이 조치는 동서 냉전 갈등의 본격화로 이어졌고, 서방국가들의 대응을 촉발했습니다.
이후 연합국은 약 1년간 공수 작전을 통해 식량과 연료를 공급하며 대응했습니다.
1972 – 워터게이트 녹음테이프 공백 발견 (미국)
닉슨 대통령의 백악관 녹음 파일에서 약 18분간의 음성이 사라진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공백은 의도적인 삭제 가능성으로 의심받으며 수사에 핵심 증거로 작용했습니다.
결국 이 사안은 대통령의 신뢰 상실과 사임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1991 – 남슬라브 국가들 독립 선언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후 군사 충돌이 발생하며 발칸 전쟁으로 이어졌고 국제사회의 중재가 시도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동유럽 지역의 민족 분쟁과 국제 정치의 변화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7 – 동티모르 독립 승인 선언 (동티모르)
동티모르 의회는 유엔의 지원 아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공식 표명했습니다.
이 선언은 인도네시아의 지배에 대한 종결을 의미하며 국제적 승인을 받았습니다.
2002년 정식 독립으로 이어지기 전 단계로서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록됩니다.
🔎 사건 들여다보기
캘커타 블랙홀 사건 – 영국 식민통치 정당화 계기로 활용된 감금 사망 사건
1. 사건 배경 및 요새 점령 (1756년 6월 20일)
인도 벵골의 나와브 시라즈 우드-다울라는 동인도회사의 요새 포트 윌리엄을 공격해 점령했습니다. 요새에는 방어 시설이 미비했고 병력이 집중되지 않아 벵골군이 비교적 쉽게 진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인 군인, 관리, 민간인, 일부 인도인이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2. 밀폐 감방 내 수감과 집단 사망
포로 약 146명이 폭 4.3m, 길이 5.5m 크기의 작은 감방에 수용되었습니다. 이 공간은 통풍이 거의 되지 않는 환경이었으며, 뜨거운 기후와 과밀 상태로 인해 질식과 탈수로 고통받았습니다. 이튿날 아침까지 약 23명만 생존한 채 발견되었고, 많은 수가 사망했습니다.
3. 홀웰 생존자 증언과 통계 논란
생존자 존 홀웰은 사건발생 직후 “146명 수감, 123명 사망, 23명 생존”이라고 기록하였으며, 이 기록은 초창기 보고서와 영국 문헌에 대대적으로 인용되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학자들은 수감 인원과 사망자 수가 과장됐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실제 규모는 약 64명 중 21명 생존 수준일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4. 영국의 보복 및 식민 확장 계기
영국은 이 사건을 명분 삼아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벵골군을 공격했고, 이 전투의 승리로 벵골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강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포트 윌리엄은 다시 영국 손에 들어갔고, 이를 계기로 동인도회사 지배 체제가 본격화되었습니다.
5. 사건의 역사적 평가와 유산
캘커타 블랙홀 사건은 인도 식민 역사에서 영국의 선전 전략으로 자주 언급되며, 이후 홀웰의 기념비 및 교과서 서술에 활용되었습니다. 독립 이후에는 이 사건의 해석, 기념비 철거, 피해자 수 논쟁 등 다층적인 역사 해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홀웰 주장의 과장 여부를 둘러싼 재검토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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