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기념일
- 🇧🇾 독립기념일 (벨라루스)
1944년 민스크 해방일을 기념하며 1996년 국민투표로 국경일로 확정되었습니다. 수도 민스크에서는 군사 퍼레이드와 불꽃놀이가 진행됩니다. 행사는 해방과 주권 회복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 🇲🇲 여성의 날 (미얀마)
1996년 국가 여성 위원회 창설일을 기념합니다. 정부와 시민사회가 성평등 로드맵 실천 성과를 발표합니다. 관련 세미나와 교육 프로그램이 전국적으로 운영됩니다. - 🇻🇮 해방의 날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1848년 세인트크로이에서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된 날을 기립니다. 지역 사회는 주간 축제와 재현 행사를 열어 해방 정신을 기립니다. 의회는 이 기간을 ‘자유 주간’으로 선포합니다. - 🇺🇳 국제 비닐봉투 없는 날 (국제)
2009년 시민단체 주도로 시작된 환경 캠페인입니다. 전 세계 도시가 재사용 가방 보급 행사를 동시에 진행합니다. 여러 국가가 이 날을 계기로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 규제를 강화합니다. - 🇺🇸 ‘Dog Days’ 시작 (미국)
『Old Farmer’s Almanac』는 7월 3일부터 8월 11일까지를 고온기 ‘Dog Days’로 정의합니다. 농업 달력은 이 기간 가축 관리와 열대성 작물 재배 주의 지침을 제시합니다. 기상 기관은 열파 대비 계도 활동을 강화합니다.
🕰 역사 속 오늘
① 고대~19세기
- 324 – 아드리아노플 전투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1세가 공동 황제 리키니우스를 격파해 제국 재통일의 길을 열었습니다. 승리는 기독교 우호 정책을 강화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 건설이 가속화되었습니다. - 987 – 위그 카페 즉위 (프랑스)
파리 생드니 대성당에서 위그 카페가 프랑스 왕으로 관식했습니다. 카페 왕조는 300년 넘게 지속되며 중세 프랑스 중앙집권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봉건 귀족 연합 체제 속에서 왕권 강화가 시작되었습니다. - 1608 – 퀘벡 시티 건설 (캐나다)
사무엘 드 샹플랭이 세인트로런스 강 둔덕에 정착지를 세웠습니다. 퀘벡은 누벨프랑스의 행정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프랑스 북미 식민 통치의 핵심 거점이 되었습니다. - 1775 – 조지 워싱턴, 대륙군 총사령관 부임 (미국)
워싱턴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군영에서 장검을 뽑아 지휘권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식민지 연합 전략 통일이 가능해졌습니다. 행위는 독립 전쟁 지속 의지를 대내외에 확인했습니다. - 1863 – 게티즈버그 전투 종결 (미국)
3일간의 격전 끝에 연방군이 승리하면서 남북전쟁의 주도권이 북군으로 넘어갔습니다. 피켓의 돌격 실패가 남부군 전력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습니다. 전투는 전쟁 국면의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② 20세기 이후
- 1938 – ‘말라드’ 기관차 속도 기록 수립 (영국)
LNER A4형 ‘말라드’가 시속 126마일(약 203km)을 달성해 증기 기관차 최고 속도 기록을 세웠습니다.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았습니다. 사례는 철도 공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 1940 – 메르스엘케비르 공습 (알제리)
영국 해군이 독일 접수 가능성이 있던 프랑스 함대를 공격했습니다. 작전은 프랑스 함정 탈취를 방지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사건은 양국 관계에 장기적 갈등을 남겼습니다. - 1962 – 알제리 독립 공식 승인 (프랑스/알제리)
에비앙 협정에 따라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했습니다. 132년 식민 지배가 종식되었습니다. 양국은 이후 외교 관계 재정립 과정을 거쳤습니다. - 1988 – 이란항공 655편 피격 (이란/미국)
미 해군 순양함 USS Vincennes가 민항기를 미사일로 격추해 탑승자 290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사고는 중동 해역 군사 긴장을 심화시켰습니다. 사과와 배상 절차는 1996년에야 마무리되었습니다. - 2013 – 이집트 군부 정변 (이집트)
압델 파타 엘시시 국방장관이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했습니다. 헌법이 정지되고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정변은 이후 정치 지형과 시민 사회 재편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 사건 들여다보기
- 남북전쟁이란 무엇입니까?
-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 안에서 벌어진 내전입니다.
- 북부(연방)와 남부(연합)가 갈라져 싸웠으며, 주요 쟁점은 노예제 유지 여부와 주(州)의 권한이었습니다.
- 게티즈버그 전투는 왜 중요합니까?
-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벌어졌습니다.
- 남부군은 북부 땅으로 올라와 승리를 노렸지만, 세 차례 격전 끝에 북부군이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 남부군은 약 2만 8천 명, 북부군은 약 2만 3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습니다.
- 전투가 전쟁에 끼친 영향은 무엇입니까?
- 남부군은 이후 큰 규모의 북부 침공을 다시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 북부군은 전쟁 주도권을 잡아 전투 이후 전반적으로 우세를 유지했습니다.
- 오늘날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환점’으로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중요하게 평가됩니다.
1863년 게티즈버그 전투 종결
[배경]
1863년 6월 로버트 E. 리 장군이 북버지니아군을 이끌고 펜실베이니아로 진입했습니다. 남부군은 북부 본토에서 승전을 거두어 전세를 바꾸고 외교적 승인을 얻으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북군은 새로 임명된 조지 G. 미드 장군의 포토맥군이 기동해 방어선을 형성했습니다.
[전투 1일차: 7월 1일]
남부군 선발대가 게티즈버그 북서쪽에서 북군 척후부대와 충돌했습니다. 전투는 도시 북부와 서부에서 격화되어 북군이 남쪽 능선으로 후퇴했습니다. 북군은 커머니티 리지와 새먼티니 힐 일대에서 방어진을 재편했습니다.
[전투 2일차: 7월 2일]
리 장군은 북군 좌익 라운드 톱 지역과 우익 컬프스 힐을 동시 공격했습니다. 양측은 리틀 라운드 톱, 피치 장원, 실로 숲 등 다수 지점에서 교전을 벌였습니다. 북군은 고지 방어선을 유지하여 남부군의 측면 돌파를 저지했습니다.
[전투 3일차: 7월 3일]
리 장군은 중앙 돌파를 위해 제임스 롱스트리트 지휘 하에 피켓·페티그루·트림블 사단 약 12,500명을 투입했습니다. 공격대는 1.6km 개활지를 진격했으나 북군 포병과 보병의 집중 사격으로 약 절반의 손실을 입고 후퇴했습니다. 이른바 ‘피켓의 돌격’ 실패로 남부군은 공세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피해 규모]
사흘 전투 동안 양군 합계 사상자는 약 51,000명으로 추산됩니다. 남부군이 약 28,000명, 북군이 약 23,000명의 인명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남북전쟁 단일 전투 최대 규모 피해 중 하나입니다.
[결과]
리 장군은 7월 4일 밤 퇴각을 개시해 포토맥 강 이남으로 철수했습니다. 북군은 수도 방어선을 보호하며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습니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되며, 이후 전쟁 주도권은 북군에게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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