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기념일
- 미국 독립기념일 (미국)
1776년 7월 4일 제2차 대륙회의가 독립 선언서를 채택하여 13개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날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는 불꽃놀이·퍼레이드·가족 모임 등으로 건국의 의미를 기립니다. -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기념일 (대한민국)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남북공동성명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법정 공휴일은 아니지만 한반도 긴장 완화의 의의를 기념하는 비공식 기념일로 회자됩니다. 이후 남북조절위원회 설치 등 제도적 대화의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 필리핀 공화국의 날 (필리핀)
1946년 7월 4일 ‘마닐라 조약’ 발효로 미국이 필리핀의 완전한 주권을 승인하면서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습니다. 1962년까지는 국가 공휴일이었으나 1987년 공휴일 목록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현재는 정부·시민 단체가 역사 교육 행사를 열어 독립의 의미를 기립니다. - 필리핀-미국 우정의 날 (필리핀·미국)
1955년 제정된 이 기념일은 양국의 동맹 관계를 기념합니다. 1987년 이후 공휴일 지위는 사라졌으나 지방 정부와 필리핀계 미국인 사회가 문화 교류 행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군사·경제 협력사와 이민 역사를 재조명하는 세미나가 열립니다. - 앨리스 인 원더랜드 데이 (영국)
1862년 7월 4일 루이스 캐럴이 템스강 보트 여행 중 리델 자매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를 처음 들려준 사건을 기념합니다. 옥스퍼드에서는 매년 낭독회와 분장 퍼레이드를 개최하여 고전 문학의 탄생 배경을 소개합니다. 전 세계 독서 모임도 이날을 맞아 작품 세계를 탐구합니다. - 코믹 산스 데이 (국제)
2009년 네덜란드 라디오 진행자들이 제안한 이후 매년 7월 첫 금요일에 열립니다. 2025년에는 해당 금요일이 7월 4일과 일치하여 웹사이트와 문서가 코믹 산스 서체로 꾸며집니다. 서체 다양성과 인터넷 문화 현상을 함께 돌아보게 합니다. - 인디펜던스 프롬 미트 데이 (미국)
1985년 미국 채식 단체가 7월 4일 육류 소비를 줄이자는 캠페인으로 제정했습니다. 기후변화 대응과 동물복지 증진을 목표로 채식 식단을 권장합니다. 식당과 식품 기업은 대체 단백질 메뉴를 집중 홍보합니다.
🕰 역사 속 오늘
① 고대~19세기
- 1054 – SN 1054 초신성 관측 (중국)
1054년 7월 4일 중국 송대 기록에 매우 밝은 ‘객성’이 등장했습니다. 오늘날 이 현상은 게성운을 남긴 초신성 폭발로 확인됩니다. 해당 기록은 현대 초신성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활용됩니다. - 1187 – 하틴 전투 (예루살렘 왕국)
1187년 7월 4일 살라딘이 십자군 주력군을 하틴 언덕에서 포위·격파했습니다. 십자군은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며 방어 거점을 잃었습니다. 전투 결과로 살라딘은 같은 해 예루살렘 재점령에 성공했습니다. - 1776 – 미국 독립선언 승인 (미국)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 제2차 대륙회의가 독립 선언서를 채택했습니다. 문서는 자연권·인민주권 원칙을 명문화했습니다. 이후 세계 혁명 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 1802 –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개교 (미국)
1802년 7월 4일 미국 육군사관학교가 뉴욕 허드슨강 고지대에서 첫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기관은 공병·과학기술 장교 양성을 목표로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미 육군 지휘관 배출의 핵심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 1863 – 빅스버그 전투 종료 (미국)
1863년 7월 4일 남군이 북군에 항복하면서 47일간의 빅스버그 포위전이 종료되었습니다. 북군은 미시시피강을 완전히 장악해 남군 전선을 동서로 분리했습니다. 전투는 남북전쟁의 전략적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② 20세기 이후
- 1918 – 메흐메트 6세 즉위 (오스만 제국)
1918년 7월 4일 메흐메트 6세가 제36대 술탄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연합국 점령 하에서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1922년 오스만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퇴위하였습니다. - 1946 – 필리핀 제3공화국 수립 (필리핀)
1946년 7월 4일 미국이 필리핀의 주권을 승인하며 독립이 공식화되었습니다. 마누엘 로하스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이후 필리핀은 외교·국방 주권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 1960 – 50성 미국 국기 첫 게양 (미국)
1960년 7월 4일 하와이 편입을 반영한 50성 미국 국기가 공식 게양되었습니다. 디자인은 9열·11열 별 배열을 포함합니다. 이후 국기 형태는 변경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습니다. - 1972 –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대한민국)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었습니다. 문서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원칙과 군사적 긴장 완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후 남북조절위원회와 적십자 회담이 이어졌습니다. - 1976 – 엔테베 작전 성공 (이스라엘·우간다)
1976년 7월 4일 이스라엘 특수부대가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인질 102명을 구출했습니다. 작전은 90분간 진행되어 납치범을 제압했습니다. 지휘관 요니 네타냐후가 전사하였습니다. - 1997 – 마스 패스파인더 착륙 (미국)
1997년 7월 4일 마스 패스파인더 탐사선이 화성 아레스 발리스에 착륙했습니다. 착륙선은 ‘칼 세이건 기념 기지’로 명명되었습니다. 소저너 로버가 지표 이동 및 토양 분석을 수행했습니다. - 2012 – 힉스 보손 발견 발표 (스위스)
2012년 7월 4일 CERN 실험팀이 질량 125 GeV 부근에서 힉스 보손 관측을 발표했습니다. 측정 값은 표준모형 예측과 일치했습니다. 발견은 입자 물리학의 기본 이론을 실증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 사건 들여다보기
1776 .7.4– 미국 독립선언 승인( 미국 독립기념일)
배경: 식민지-대영 제국 갈등의 심화
1774년부터 시작된 제1·제2차 대륙회의는 보스턴 차 사건 이후 고조된 조세·무역 규제 갈등에 대응하기 위해 소집되었습니다. 1775년 렉싱턴·콩코드 전투로 무력 충돌이 본격화되면서 식민지 대표들은 독립 논의를 공식 의제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13개 식민지는 무장 충돌이 장기화될 경우 독립 외 선택지가 없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
1773년 12월 16일, 영국의 차세 법(Tea Act)에 반발한 보스턴 애국단(Sons of Liberty) 회원들이 인디언 복장으로 변장해 동인도회사의 차 342상자를 보스턴 항에 투척했습니다. 식민지 주민들은 ‘대표 없는 과세’에 대한 항의로 항만 폐쇄 등 강경한 ‘강제법’ 도입 계기를 만들었고, 이는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사건 후 영국 의회는 매사추세츠 식민정부를 직접 통제하고 주둔 병력 유지비 부담을 요구했으며, 다른 식민지들도 결집하여 제1차 대륙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불신 심화.
1776년 6월: 리처드 헨리 리 결의안 제출
버지니아 대표 리가 “자유롭고 독립된 주”를 선언하는 결의안을 올리자, 회의는 초안 기구를 구성하여 선언문 작성을 병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등 5인이 초안 위원회에 선출되었습니다. 위원회는 유럽 계몽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자연권·사회계약 개념을 포함하기로 합의했습니다.
1776년 6월 11–28일: 초안 작성과 수정
제퍼슨이 작성한 초안은 6월 28일 회의에 제출되었고, 이후 7월 2일까지 80여 개 문구가 토론·수정되었습니다. 노예제 비판 문단은 남부 식민지 반발로 삭제되었으며, 대영제국에 대한 고발 조항이 구체화되었습니다. 초안은 주권·자연권·국왕의 전제정 비판이라는 3단 구조로 정리되었습니다.
1776년 7월 2일: 독립 결의안 가결
대륙회의는 리 결의안을 12대 0(뉴욕 기권)으로 통과시켜 독립 방침을 확정했습니다. 표결 직후 의장은 선언서 문안 확정을 위해 추가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이 단계에서 서명 양식·문구 배열·서두 표현 등이 최종 조정되었습니다.
1776년 7월 4일: 독립 선언서 채택 및 공표
회의는 이날 선언서를 만장일치로 승인하고, 의장 존 핸콕이 공식 사본에 최초 서명했습니다. 선언서는 같은 날 저녁 인쇄소로 보내져 200여 부가 제작되어 식민지 전역에 발송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 주 의사당 앞 낭독을 시작으로 각 식민지는 공개 낭독과 축포 행사로 결정을 알렸습니다.
핵심 내용: 자연권·인민주권·식민지 고발
첫 단락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자연권 원칙을 명문화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단락에서 정부는 “피통치자의 동의에서 정당성을 얻는다”는 인민주권을 선언했습니다. 본문 중후반부는 국왕 조지 3세의 입법 거부·사법 간섭·상인 단속 등 27개 불만 사항을 열거하여 결별 사유를 제시했습니다.
즉각적 영향: 국내외 승인 확보
선언서는 대륙군 사기 진작과 식민지 내부 지지 결집에 기여했습니다. 프랑스·네덜란드는 비공식 통상 지원을 확대하여 대영 항전을 도왔습니다. 1778년 프랑스-미국 동맹 체결의 사상적 명분이 되었습니다.
장기적 파급: 세계 혁명 운동의 준거
1789년 프랑스 인권 선언, 1810년대 라틴아메리카 독립 선언 등은 미국 선언서의 자연권·주권 원칙을 부분적으로 인용·계승했습니다. 20세기 탈식민지 독립 문서 또한 선언서 문구를 차용하여 보편적 인권·자결권 논리를 강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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