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같은 한글로 쓰였지만 결이 다른 문장 앞에서, 겨울 산성의 버팀과 굴복, 국가의 체면과 민생의 간극을 바라본 독서기록입니다.
1) 책이름과 작가이름
- 제목: 남한산성
- 작가: 김훈
2) 줄거리 요약
명(明)이 무너지고 청(淸)이 들어서자, 인조는 한양을 등지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갑니다. 성문이 닫히고 겨울이 길어지며 혹한과 식량난이 이어집니다. 밖에서는 청의 군사가 포위를 좁혀 오고, 성 안에서는 의리(척화)와 현실(주화) 사이에서 대신들의 말이 부딪힙니다. 말은 커지지만 밥과 장작은 줄어들고, 백성의 고통은 눈처럼 쌓입니다.
사신 왕래가 거듭되고, 마침내 청 태종(칸)은 무릎을 꿇고 황제를 칭해 복속하라고 요구합니다 (세자 볼모 요구까지 얽혀 있습니다). 인조는 살고자 하여 무릎을 굽히고 항복의 뜻을 밝힙니다. 성 안의 겨울은 끝나지만, 그 겨울이 남긴 국가의 체면과 민생의 간극, 그리고 사람들 마음의 긴 서늘함은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3) 독서기록
김훈이란 작가를 마주 대하며 경외감이 들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같은 한국말로 이런 문장을 만들어 내지만, 나는 읽을 수 있을 뿐 그 모든 뜻을 다 헤아릴 수 없고, 또한 다시 적을 수도 없습니다.
어엽고도 심오한데, 가끔은 같은 말인 듯 다른 의도를 드러내는 이 글은 뭘까. 나 다시 또 다시 이렇게 초라해집니다. 감히 글을 쓰려고 했던 나는 소파 밑에 눈을 내리깔고 숨어버렸습니다. “아, 이런 거구나… 큰 작가란 이런 거구나.”
기억에 남은 대목
“적들이 올라올 것을 대비해 돌을 모아야 한다. 그렇지만 돌을 쓸 날이 온다면, 더 이상 돌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인데 그날을 위해 돌을 준비시킨다.”
소름끼치는 대목이었습니다. 같은 한글을 쓰는 사람인데, 정말 그러한가? 오래 멈춰 서서 생각했습니다. 돌을 모으는 일은 패배의 예행연습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의지의 형식일 것입니다. 쓸 날이 오면 이미 늦었을지라도, 그날을 위해 돌을 모으는 그 마음. 결과와 상관없이 준비의 태도는 우리 편이라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성 안에서는 두 부류가 엇갈립니다. 말을 쌓는 사람들과 장작을 쌓는 사람들. 말은 높고 멀리 날아가지만, 장작은 가까이 붙어 불이 됩니다. 눈이 더 오면 곡식의 남은 날이 줄어들고, 밥이 떨어지면 의리의 길이도 짧아집니다. 돌은 성을 지키는 육체이자 동시에 무력의 표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돌을 듭니다.
책을 덮고 나니 제 안에 남은 장면은 무릎 하나였습니다. 국가가 무릎을 꿇을 때, 국민의 등은 더 굽어지는가. 체면과 생존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 저는 저의 무식함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조금은 배웠습니다.
- 사물부터 보기: 눈·돌·밥·불 — 말보다 먼저 체온을 만드는 것들을 적기.
- 짧게, 깊게: 문장은 짧게, 대상과의 접촉은 깊게.
- 준비의 윤리: 결과가 어떻든 준비하는 태도를 기록하기.
저는 아마 일백 번 다시 태어나도 이런 작가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오늘, 한 줄을 더 적을 용기는 얻었습니다. 읽을 수 있을 뿐이던 내가, 이제는 사물을 먼저 보고, 짧고 단단하게 적는 법을 조금 배웠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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