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장남 문종(세자 이향)을 1429년에 확정된 적장자로 두었지만, 세자는 만성질환으로 국정 경험이 길지 않았다. 둘째 왕자 수양대군(이유, 1417–1468)과 셋째 왕자 안평대군(이용, 1418–1453)은 학문·무예·예술에서 상반된 재능을 보이며 성장했고, 세종의 재위 말년부터 이미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신료들이 두 대군의 역량을 비공식적으로 저울질했다. 세종이 1450년 2월 붕어하면서 왕권은 문종에게 승계되었으나, 문종 본인이 1452년 5월 병사하자 어린 단종(당시 12세)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시점부터 조선 조정은 ‘왕실 보위’를 명분으로 두 대군 가운데 누가 섭정 또는 보호자가 될 것인가를 놓고 격렬한 권력 투쟁에 휩싸였다.
1. 두 대군의 성장 배경과 성격
수양대군은 무예·율학·불경에 밝았으며, 장차 국방을 책임질 인물로 길러졌다. 그는 1433년 4군 설치, 1437년 6진 개척 현장 시찰에 동행하면서 함경·평안 변방의 군사 실무를 직접 경험했다. 학문적으론 성리학 · 병서도 탄탄히 공부했으나, 무엇보다 실전적·전술적 안목을 키우는 데 매진했다. 반면 안평대군은 서예·시·서화·명상에 재능을 보여 세종이 ‘문학의 화신’이라 칭할 정도였다. 그는 1424년부터 집현전 학사들과 교류하며 송설체 서풍을 발전시켰고, 왕립 도서관 교정에 자주 참여해 ‘조선 초기 서화 미학’을 주도했다. 두 사람 모두 세자와 달리 정치 일선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각자 무력 기반(수양)과 문화 기반(안평)의 ‘비공식 파벌’을 형성했고 이는 훗날 섭정 구도에서 결정적 변수가 된다.
2. 붕어 직후 세력 지형
세종 붕어 뒤 조정의 실무는 황보인·김종서를 필두로 한 공신 집단이 주도했다. 문종은 장자인 만큼 명분이 확고했으나 잦은 질병으로 국방·재정 개혁을 모두 직접 챙길 체력이 부족했다. 수양대군은 변방 군사 경험과 정3품 의흥총부 도총관 경력을 무기로 ‘왕실 외척 보호’ 명목의 군사 통솔권을 확보하려 했고, 안평대군은 집현전과 도화서 인맥·사가 독서당을 매개로 신진 사가·도학파를 규합했다. 특히 단종 즉위 직전(1452 5월)엔 “어린 임금을 둘러싼 숙부 보호 체제” 구성이 필수였기에 양대 군의 정치 네트워크가 급속히 세를 확장했다. 사헌부·사간원 언관은 “부군(府君)들이 외왕내후하니 권신 다툼의 화근”이라 상소했으나, 문종·단종 두 대(代)가 모두 약체인 상황에서 숙부 세력 약화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이 우세했다.
3. 결정적 갈등: 계유정난
1453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정승 김종서·황보인 일파를 살해·축출했다. 수양은 사건 직후 “단종 보위를 위협하는 대신의 횡포를 제거했다”는 교서로 민심을 선점했고, 왕실 종친 다수가 ‘궁정 쿠데타’임을 알면서도 실력 행사에 굴복하였다. 안평대군은 변란 소식을 듣자 200여 서화 유생과 상소·면서를 준비했으나, 군사를 동원할 실질 병력이 부족했고 결정적으로 집현전 해산(세조 즉위 후 1455) 조짐이 미리 포착되면서 지식인 집단이 일시에 해체돼 문화권력 기반이 무력화됐다. 결국 안평은 같은 달 제주 유배령을 받았고 이듬해 육지로 소환되는 길에 사사(賜死)되면서 ‘평화적 섭정’ 가능성은 소멸한다. 수양은 1454년 스스로 보위대군 직함을 사용하며 국정 결재를 대리했고, 1455년 6월 11일 단종을 강제 양위시켜 제7대 왕 세조로 등극했다.
4. 승계 정착과 역사적 평가
세조 즉위 후 5년간의 1차 왕권 안정 국면에서 가장 먼저 시행된 정책은 무과 중심 군공 포상·직전법 개정·불교 정책 완화였다. 이는 수양대군 시절부터 지지 기반을 제공한 무장·향리 계층에게 보상하는 동시에 유교 관료 체계가 과도한 언론 기능으로 왕권을 제약하는 상황을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반면 안평대군계 사림·집현전 학자는 대거 낙향·은거·역모 참소 대상으로 몰려 조선 전기 지식 사회가 급격히 위축된다. 세조가 『경국대전』 편찬을 추진해 행정 체계를 법전화한 점은 왕권 강화와 함께 중앙 관료제를 정돈한 공으로 남지만, 왕위 찬탈·종친 살해라는 정치적 폭력성은 후대에 “세조의 공과(功過)는 평행선”이라는 평가를 낳는다. 두 대군의 경쟁은 결국 무력 기반이 문화 기반을 압도한 사례로 기록되며, 이 사건은 이후 조선 왕실이 ‘왕위는 장자, 보호는 종친 집단 공동 관리’라는 좀 더 복합적인 전통을 모색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 용어 설명표
- 계유정난 –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
- 집현전 – 세종 대 설립된 왕립 학술기관, 세조 즉위 후 해산.
- 보위대군 – 단종 보호 명목으로 수양대군이 자칭한 직책.
- 직전법 – 세조 4년(1458) 시행, 수조권 지급 대상 축소 · 군량 확보 법제.
- 사사 – 왕명으로 내리는 사형. 독약·비밀 집행이 일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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