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예악(禮樂)은 치세의 근본”이라 보고, 중국 악제(雅制)에 기초하면서도 조선 고유의 의식음악 체계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1430년 『세종실록』에 수록된 악서제정금보(樂書制定禁補)·제례악장(祭禮樂章) 조항은 이를 뒷받침하는 1차 사료입니다. 세종은 1430년대 초 아악 복원‧현행화를 목표로 악기 규격, 음률 교정, 악장(樂章) 작성을 단계별로 추진했고, 1440년대에는 문자·음악 융합을 통해 백성이 함께 즐길 음악을 제작했습니다. 다음 연대표와 각 항목 해설은 모두 『세종실록』 기사(권55·61·93·110 등)와 학계 고증 자료에 근거합니다.
배경 (1418~1429)
세종 즉위(1418.8.18) 당시 궁중 의식음악은 대부분 고려 후기에 수용된 중국 아악(雅樂)에 의존했습니다. 『세종실록』 권4는 “가(歌)·악(樂)의 법도가 퇴폐해 음정이 어긋나고 악기가 결손되었다”고 기록해, 음률 불안과 악기 규격 불일치가 국왕 즉위 초기 주요 문제였음을 말해 줍니다. 세종은 즉위 직후 악학(樂學) 재정비를 위해 박연을 장악원 제조로 삼고, 궁중 악공·악생 인원·직급을 전수 조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1421년에는 신라 향악·당악 계열 자료를 수집해 정리케 했으며, 1423년에는 악학사(樂學司)를 장악원 산하로 편입하여 악기 제작·수리 기능을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제도 개편은 이후 아악 복원 작업이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행정 기반이 되었습니다.
1430년 의식음악 정비 – 악서 편찬
1430년 1월 『세종실록』에 수록된 《의례악지(儀禮樂志)》·《악학궤범(樂學軌範)》 초안은 조선 초기 아악 체계 복원의 출발점으로 평가됩니다. Robert C. Provine 논문 “The Treatise on Ceremonial Music (1430)”은 실록 텍스트가 음률 산정·악기 규격·무무(舞舞) 동작까지 포괄하는 종합 지침서였음을 확인합니다. 세종은 음률 교정 시 중국 율관에 의존하지 않고, 황종율(黃鐘律)을 한반도 기후·고도에 맞게 신산출한 12율·4청성 체계를 채택했습니다. 또한 12율관 제작법·악기 재료 표준을 명시해 악기 편성을 국산 재료 중심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러한 “현지화된 아악”은 이후 1430년대 중반 왕실 제향·국빈 연향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되며, 조선 고유 의식음악 형성의 기점이 되었습니다.
1433~1434년 아악 부활과 궁중 연향
1433년 1월 1일(세종 15) 새해 조회에서 “궁중 연향을 거행하며 새로 정비한 아악을 연주했다”는 기록이 실록 권61에 등장합니다. 같은 해 6월 9일과 8월 11일에는 박연·장영실 등이 혼천의·간의 제작 완료를 보고하면서 “회례연(會禮宴)에 맞추어 대악(大樂)을 시연했다”는 내용이 추가 기록돼 음률·천문 과학이 의례 음악 정비와 병행되었음을 입증합니다. 1434년 7월 1일에는 자격루 시험 가동과 함께 시각에 맞춰 ‘박(拍)’을 주는 자동 타종 장치가 연향 진행 시간을 일정하게 조정했으며, 10월 1일에는 세종이 경회루에서 신하·학자에게 신식 해시계(앙부일구)를 공개하면서 “천의(天義)는 음악·율려와 부합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1433~1434년 연향 기록은 개정 아악이 실제 국가 의례·외교 연회에 적용된 첫 사례로, 음정·장단·무무가 표준화된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443년 정간보 창안
1443년(세종 25) 세종은 음 높이·길이를 동시에 표시할 수 있는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해 악서 부속 《악보정간(樂譜井間)》으로 반포했습니다. 정간보는 가로·세로 격자를 기준 박(拍) 단위로 나누고, 한 칸에 한 음을 기재해 시·공간 정보를 직관적으로 표현합니다. 실록 권93은 “정간보를 사용하니 시김새와 장단을 쉽게 전달할 수 있어 악공이 빠르게 익혔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음장(音長)’까지 기보한 체계로, 복합 리듬을 갖는 향악(鄕樂)·당악(唐樂) 악곡도 정확히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정간보 도입 이후 악학원은 교육용 악보를 대량 제작하여 각 도 수령·향교·사부학당에 배포했고, 음악 교육의 지역 격차를 완화했습니다. 현대에 남아 있는 세조실록 악보·악학궤범 군례악 악보 역시 정간보를 기반으로 편찬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1447년 여민락·종묘제례악 완성
1447년(세종 29) 6월 5일 『세종실록』 권110에는 “새로 작곡한 여민락(與民樂)을 종묘·사직 제향에 올리고 무고(舞鼓)의 장단을 정하다”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여민락은 용비어천가 1~4장을 가사로 삼아 ‘군(君)·신(臣)·민(民)의 조화’를 노래하는 향악 곡으로, 백성과 공유할 수 있는 궁중 음악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종묘제례악(보태평·정대업) 선율·무무(8×8 일무)·악장(樂章)이 완성되어 왕세자 문종 주관 종묘 시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UNESCO ICH 자료에 따르면 두 악장은 세종 작곡·악장 초안을 기반으로 1464년(세조 10) 의식 편성만 소폭 개정되었을 뿐, 선율 뼈대는 현재까지 전승됩니다. 세종은 여민락·종묘제례악을 통해 “예악으로 민심을 교화한다”는 유학적 이상을 구현했으며, 조선 왕실 의례 음악은 완전한 독자 체계로 정착했습니다.
📌 실록 속 결정적 장면
① 1430년 2월 25일 : 음률 교정 회의 소집 – 세종이 박연·김효상 등 악학관을 불러 황종율 재산출 방법을 하향식으로 검증토록 명령(『세종실록』 권55).
② 1434년 7월 1일 : 자격루와 악령(樂令) 조화 시험 – 자격루 시보에 맞추어 ‘대악(大樂)’ 포구락을 시연, 시각 오차가 없다는 보고를 받음(권63).
③ 1443년 12월 20일 : 정간보 교육령 – 정간보 채보법을 악공·학생·종친에게 가르치도록 하는 교서를 반포(권94).
🔖 용어 설명표
- 아악(雅樂) : 중국 성악·기악 형식을 기반으로 한 유교 의식음악.
- 정간보 : 세종이 창안한 격자식 음·장단 기보법.
- 여민락 : “임금과 백성이 함께 즐긴다”는 뜻의 향악 곡, 1447년 작곡.
- 종묘제례악 : 왕실 선조 제향에 연주되는 의식음악. 보태평·정대업이 대표.
- 악학궤범 : 세조 대 완성된 궁중 음악·무용·의식 총서. 초안은 세종 조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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