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물 기본 정보
출생 | 정확한 연도 미상 (학계 다수설 : 1390 년대 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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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기록 미상 – 1442 년 파직 이후 행적이 사료에서 사라짐 |
본관 | 동래(東萊) *고향 및 관노 등록지* |
신분 | 동래현 관노 출신 → 세종의 발탁으로 면천 |
관직 | 관상감 제조 → 상의원 별좌 → 교서관 직제 → 대호군 (종3품) |
2. 성장 과정과 초기 경력
동래 지역은 고려 말·조선 초부터 왜구 방비를 위한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이곳 관청에는 배 제작·군기 수리·금속 세공을 담당하는 다수의 공장(工匠) 노비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장영실은 그러한 기술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목공·쇠주물·측량술을 익혔습니다. 세부 교육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천평저울을 비롯한 정확 계측 공구를 제작해 관문 수리창에 납품했다는 지방 문서가 실록에 언급됩니다. 그는 작업 현장 노장(老匠)들로부터 ‘쇳소리만 듣고 합금 비율을 짐작하는 재주’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를 눈여겨본 동래현감이 태종 재위 말 도천법 인재 추천 명부에 올리면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1410년대 한양으로 올라온 그는 경복궁 선원전 뒷마당 소조(小造) 공방에서 물시계 부품을 수리하며 능력을 증명했고, 이때 만든 간이 물수차가 궁궐 연못 물길을 바꿀 정도로 유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지방 노비가 한양 궁궐 기술자로 전격 발탁된 사례는 당대에도 극히 드물었습니다.
3. 세종의 발탁과 중국 파견(1421년)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농업·천문·의약을 과학적으로 정비하려 했습니다. 그는 장영실이 만든 소형 수차와 회중시계 모형을 살핀 뒤, “세밀한 이치가 손끝에서 살아 움직인다”고 칭찬하며 신분을 따지지 말고 곧바로 궁중 기술직에 투입하라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1421년 3월, 윤사웅·최천구 등과 함께 명나라 경사(北京) 천문관 측량소로 파견된 장영실은 혼천의·자격루·수차식 천평(天平) 제작법을 배웠고, 특히 기어를 단계별로 잇는 차륜비 계산법을 독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귀국 후 그는 관노 신분에서 면천하여 종5품 상의원 별좌에 올랐는데, 이는 “기술에는 귀천이 없다”는 세종의 국시(國是)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장영실은 왕에게 직접 시제품을 보여주는 방식을 선호했으며, 간이·자격루·앙부일구 제작 과정마다 세종의 질문에 공학적 근거로 대답해 ‘과학 토론의 문화’를 조선 궁중에 뿌리내렸습니다.
- 1421 년 : 명나라 사신단 견학 → 혼천의·자격루 부품 설계 도면 습득
- 1423 년 : 귀국 직후 면천·상이원 별좌 임명
- 세종은 기술관료에 대한 파격 승진 절차를 정례화하여 “장인도 품계가 있어야 책임이 선다”고 공표
4. 주요 발명·제작 연대표
연도(세종 연간) | 발명·제작 | 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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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 (14년) | 간의대 설치·간의 제작 | 고정식 천체관측기로 별·행성 좌표 측정 오차 대폭 축소 |
1433 (15년) | 혼천의 | 회전식 천구의 완성, 천문 기기 국산화 본격 시작 |
1434 (16년) | 자격루 (보루각 물시계) | 수차·기어식 자동 타종 시계, 국가 공식 표준시계로 채택 |
1434 (16년) | 앙부일구 | 휴대용 반구 해시계, 전국 주요 도시에 보급 |
1441 (23년) | 측우기 | 세계 최초 강우량 측정 기구, 농업 기상 관측 체계 수립 |
5. 관직과 행정 참여
기술자의 신분 한계를 넘어 장영실은 결국 대호군(종3품)이 되었습니다. 대호군은 일반적으로 무반이 맡지만, 세종은 관상감·간의대 등 과학기구 제작 조직을 총괄하도록 그에게 동일 품계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기구 제작뿐 아니라 장인 선발·예산 집행·품질 검수까지 관여했고, “실험한 것은 반드시 기록하고, 기록은 반드시 다음 세대가 고칠 수 있게 하라”는 규정을 제정해 기술 표준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1442년 겨울, 영하의 날씨에 차륜이 얼어붙어 왕이 탄 가마 차축이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하자, 그는 지휘 책임을 이유로 장 100대와 파직을 자청했습니다. 세종은 형량을 감경했지만, “큰 재능이 큰 책임을 진다”는 원칙을 들며 결국 파직을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장영실의 이름은 실록에서 자취를 감추며, 당시 조정이 기술관료 기록을 장기간 보존하지 못한 한계 또한 드러냈습니다.
6. 인간적 면모
장영실은 기술자 신분으로서도 유교적 청렴·검약을 실천했습니다. 관노 시절부터 “쇠는 녹슬지만 손은 녹슬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하며, 하루에 연마·주조·설계·기록 네 가지 일을 모두 점검했다고 합니다. 상궁들에게 받은 포상 비단을 다시 녹여 기어를 주조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견습공에게는 “기본기를 세 번 확인하기 전에 왕 앞에 나설 생각을 하지 말라”고 지도했습니다. 또한 실패 사례를 숨기지 않는 문화가 실험 기술 발전의 지름길이라는 신념을 가졌으며, 실제로 자격루 톱니 간극 조정에 실패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실록에 직접 보고하는 파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러한 솔직함은 장인 사회 내에 투명한 보고 문화를 낳았고, 후대의 무기·농기구 제작 기술에도 긍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7. 생가 및 유적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은 세월이 흐르며 도시화되었지만, 현지 향토사 연구회가 20세기 후반 고문서를 조사한 결과, ‘장영실 노비 대장’이라 불리는 인명록에 그의 부친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복천동 일원에 과학공원이 조성됐고, 출생 추정지 표지석·청동 혼천의 모형·측우기 복원본이 설치돼 있습니다. 공원 안내판에는 “천민에서 과학영웅으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신분 제도 속에서도 개인 역량과 국가 비전이 만나면 역사적 전환이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한편 국립중앙과학관, 경주 첨성대 전시관, 세종대왕기념관 등에는 자격루·앙부일구 실측 복원품이 전시되어 관람객에게 조선 과학 르네상스의 숨결을 전하고 있습니다.
8. 인물 평가 요약
평가 항목 | 내용 |
---|---|
과학·기술 업적 | 자격루·혼천의·측우기 등 조선 과학혁신 3대 발명 주도 |
제도적 공헌 | 관상감 개편 → 전문 기술직 신분 상승 통로 마련 |
역사적 의의 | 천민 출신 성공 사례로 계층 이동 가능성 제시, 세종 과학 르네상스 상징 |
한계 | 1442 년 이후 행적 공백 → 기술 전승 체계 일부 단절 |
장영실의 여정은 “재능과 시대적 비전이 만나면 신분의 장벽도 무너진다”는 사실을 실증합니다. 그의 발명품은 오늘날까지도 정확한 시간·날씨 관측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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