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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오늘의역사

📅 7월 25일 오늘의 역사

by 시넘사 2025.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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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시아의 날

📌 오늘의 기념일

  • 공화국의 날 (튀니지)
    공화국의 날은 1957년 7월 25일 튀니지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한 사건을 기념합니다. 수도 전역에서 국기 게양식과 군악대 행진이 열리며, 정부 기관·학교가 휴무합니다. 공군은 기념 비행을 수행하여 국가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 과나카스테의 날 (코스타리카)
    1824년 이 지역이 주민 투표로 코스타리카 편입을 결정한 것을 기념합니다. 리베리아에서는 전통 소 몰이, 기마 퍼레이드, 마리엠바 공연이 펼쳐집니다. 지방 정부는 학교에 역사 수업 자료를 배포하여 합병 과정의 의미를 교육합니다.
  • 헌법 기념일 (푸에르토리코)
    1952년 자치 헌법 선포를 기념하는 공휴일입니다. 산후안에서는 기념 연설과 문화 행사가 열리고, 은행·공공기관이 휴무합니다. 이 날은 과거 ‘점령의 날’을 대체하여 자치권 확대를 상징합니다.
  • 갈리시아의 날 (스페인)
    1919년 갈리시아주의 단체가 제정한 지역 기념일로, 매년 7월 25일에 거행됩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에서 불꽃놀이와 전통 음악 공연이 진행됩니다. 자치정부는 갈리시아어 시 낭독과 문화유산 전시로 지역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 와인과 치즈의 날 (미국)
    2014년 지정된 기념일로, 전통적인 와인·치즈 페어링을 기념합니다. 와이너리와 치즈 공방이 시음회를 열어 지역 농가 제품을 홍보하며, 온라인에서는 #NationalWineAndCheeseDay 해시태그로 레시피가 공유됩니다.

🕰 역사 속 오늘

① 고대~19세기

  • 306 –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로 선포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1세는 306년 7월 25일 브리타니아 에보라쿰(현 요크) 주둔 로마 군단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되었습니다. 이 선포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인 통치 체제에 균열을 일으켜 제국 재편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브리타니아 방어를 정비하고 갈리아를 안정시킨 뒤 내전에서 승리하여 제국 통합을 달성하고,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공인을 단행했습니다. 이어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하여 정치·종교 중심을 동부로 이동시켰습니다.
  • 1593 – 앙리 4세 가톨릭 개종 (프랑스)
    1593년 7월 25일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파리 생드니 대성당에서 가톨릭으로 귀의하여 위그노 전쟁 종식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개종을 통해 그는 귀족의 지지를 확보하고 1598년 낭트 칙령 반포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파리는 미사 한 번의 가치가 있다’는 실용주의적 발언으로 알려진 그는 조세·군제 개혁을 추진해 절대왕정의 토대를 강화했으며, 개신교 인사 안전 보장과 제도 개편 논의를 병행했습니다.
  • 1603 – 제임스 1세 잉글랜드 즉위 (영국)
    1603년 7월 25일 제임스 6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제임스 1세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잉글랜드·아일랜드 왕위를 겸임했습니다. 이는 튜더 왕조 단절 후 두 왕국을 동군연합으로 묶은 첫 사례로, 스튜어트 왕조가 브리튼 정치의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강조하며 의회와 긴장 관계를 형성했고, 1611년 ‘킹 제임스 성경’ 출간을 후원해 영어 권 종교·문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재정 부족을 해결하려 관직 매각과 독점권 부여를 확대해 귀족·상인층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1797 – 넬슨 테네리페 전투 부상 (영국)
    1797년 7월 25일 영국 호레이쇼 넬슨 제독은 산타크루스 데 테네리페 공격 중 오른팔에 중상을 입고 현지 함상에서 절단 수술을 받았습니다. 작전은 항구의 군수품을 차단하려 했으나 상륙 지연과 포화로 목표 달성에 실패했습니다. 넬슨은 회복 후 트라팔가 해전 등을 지휘해 해군 영웅으로 자리매김했고, 영국 해군은 이번 실패를 계기로 상륙 전술·의료 체계를 정비했습니다. 스페인 측은 부상 병사를 치료해 돌려보내 인도주의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 1894 – 풍도 해전 발발 (일본·청나라)
    1894년 7월 25일 충청남도 풍도 해상에서 일본 해군과 청나라 북양함대 일부가 충돌하여 청일전쟁 최초의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일본은 순양함 ‘요시노’ 등으로 중국 함선을 격파하고 수송선 ‘고우슝’을 침몰시켜 1,000여 명의 사상자를 초래했습니다. 이 해전은 8월 1일 양국의 전면전 선언으로 이어졌고, 중국군 아산 지원 차단으로 성환 전투 패배를 불러왔습니다. 또한 일본 해군의 속도·화력 우위를 국제사회에 과시하여 해양 전술 교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② 20세기 이후

  • 1943 – 무솔리니 축출 (이탈리아)
    1943년 7월 25일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베니토 무솔리니 불신임 결의를 통과시켰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그를 해임·체포하여 피에트로 바돌리오 내각을 수립했습니다. 이는 시칠리아 전선 실패와 공습 피해로 인한 전세 악화가 배경이 되었으며, 21년간 지속된 파시스트 정권의 종식을 의미했습니다. 바돌리오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전쟁을 계속했으나 연합국과 비밀 휴전 교섭을 진행해 9월 8일 항복으로 이어졌습니다. 무솔리니 축출은 독일의 군사 개입과 북부 점령, 이후 사회공화국 수립 및 내전을 촉발해 전후 왕정 붕괴·공화정 수립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 1956 – 안드레아 도리아호 충돌 사고 (이탈리아·스웨덴)
    1956년 7월 25일 23시 10분, 이탈리아 여객선 ‘안드레아 도리아’호가 난터킷 남쪽 해상에서 스웨덴 ‘스톡홀름’호와 충돌했습니다. 우현 파손으로 선체가 급히 기울었으나 구조선·항공기 협조로 1,603명이 대피했고 51명이 사망했습니다. 조사 결과 레이더 해독 오류와 항로 결정 절차 미흡이 원인으로 지목되었으며, 국제해사기구는 시계 불량 시 통신·감속 기준을 강화했습니다. 구조 작전에는 미 해안경비대 등이 참여해 다국적 해상 협력 체계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난파선은 현재 다이빙 성지로 보존됩니다.
  • 1978 – 첫 시험관아기 루이즈 브라운 출생 (영국)
    1978년 7월 25일 영국 올덤 종합병원에서 체외수정으로 잉태된 세계 최초의 ‘시험관아기’ 루이즈 조이 브라운이 태어났습니다. 연구진은 10여 년간의 IVF 연구를 실용화하여 난임 치료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2010년 로버트 에드워즈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며 기술의 의학적 가치를 공인받았고, 이후 전 세계에서 1,000만 명 이상이 IVF로 태어났습니다. 출산 직후 제기된 생명윤리 논쟁은 관리 지침과 기술 고도화로 이어져 고위험 다태임신 감소와 착상률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 1984 – 최초 여성 우주유영 (소련)
    1984년 7월 25일 스베틀라나 사비츠카야는 살류트 7호 외부에서 3시간 35분간 우주유영을 수행해 여성 최초 EVA 기록을 세웠습니다. 티타늄·알루미늄 절단 및 용접 실험은 우주 정비 기술 검증에 기여했고, 체력·생리 데이터를 축적하여 이후 여성 우주비행 표준 마련에 활용되었습니다. 이 임무는 같은 해 예정된 미국의 여성 우주유영보다 앞서 달성되어 냉전 시기의 기술 경쟁 구도에서 소련의 우주 역량을 부각했습니다. 사비츠카야의 기록은 우주산업 인력 구성 다양성 확대 논의를 촉진했습니다.
  • 1994 – 워싱턴 선언 체결 (이스라엘·요르단)
    1994년 7월 25일 요르단 후세인 국왕과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백악관에서 워싱턴 선언에 서명해 46년간의 전쟁 상태를 종식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선언은 국경 획정·물 자원·보안 협력을 규정하고, 평화조약 체결 의지를 명문화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26일 정식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아랍 이웃국과의 정상화 사례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당일 요르단 채무 탕감·원조 확대를 발표했고, 이후 국경 지대 인프라 공동 개발 등 실질적 상호 이익이 창출되었습니다.
  • 2000 – 콩코드 추락 사고 (프랑스)
    2000년 7월 25일 파리 샤를드골 공항을 이륙한 에어프랑스 콩코드 4590편이 타이어 파편으로 연료탱크가 파열되며 이륙 2분 만에 곡네스 마을에 추락했습니다. 탑승자 109명과 지상인 4명이 사망해 초음속 여객기의 상업 운항 역사에서 유일한 치명적 사고로 기록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활주로에 떨어진 DC‑10 부품이 원인으로 확인되었고, 타이어·연료탱크 내충격 설계 개선과 활주로 관리 강화 권고가 제시되었습니다. 사고는 2003년 초음속 여객기 퇴역 결정 및 차세대 민간 초음속 개발 규제 강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건 들여다보기

1994년 워싱턴 선언 ― 이스라엘‑요르단 전쟁 상태 종식

  1. 역사적 배경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1949년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나 법적으로는 전쟁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1967년 전쟁에서 요르단은 서안지구를 상실했고, 국경·난민·수자원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계속되었습니다. 1991년 마드리드 평화회의가 공식 협상의 출발점이 되었고, 1993년 오슬로 합의 이후 요르단은 별도 평화 채널을 가속화했습니다.
  2. 협상 경과
    1994년 6월 14일 양국 대표단은 ‘공동 의제(Agreed Common Agenda)’에 합의해 경계·안보·수자원·난민·예루살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틀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7월 25일, 미국 백악관에서 후세인 국왕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워싱턴 선언에 서명했고, 빌 클린턴 대통령이 증인 서명을 했습니다.
  3. 주요 내용
    워싱턴 선언은 전쟁 상태의 공식 종료, 국경 획정 협상 원칙, 요르단강·야르무크강 수자원 공동 이용, 안보·마약 단속·밀무역 방지 협력, 문화·경제 교류 촉진 등을 명문화했습니다. 선언은 구속력 있는 최종 평화조약을 1994년 안에 체결하기로 하고 이를 명확히 밝혔습니다.
  4. 미국의 지원
    서명 당일 미국 정부는 요르단의 대미 부채 약 7억 달러를 단계적으로 탕감하고, 군사·경제 원조 확대를 약속했습니다. 미국 의회는 같은 해 9월 약 2억 달러 상환 면제를 승인해 요르단 경제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5. 후속 조치와 평화조약
    양국은 실무협상을 거쳐 1994년 10월 26일 와디 아라바 국경지대에서 ‘이스라엘‑요르단 평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약은 국제적으로 승인된 국경, 광범위한 안보 협력, 관광·통상 확대, 난민 문제 협력 절차를 구체화했습니다. 요르단은 이집트(1979)에 이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두 번째 아랍국이 되었습니다.
  6. 영향 및 평가
    선언과 평화조약으로 양국은 대사관을 교환하고 항공로·무역로를 개방했습니다. 수자원 합동위원회 설치로 야르무크강 댐 운영과 홍해‑사해 운하 구상 등이 논의되었습니다. 한편 팔레스타인 문제와 국내 여론, 2000년대 이후 안보 불안으로 인해 관계가 제한적으로 발전해 ‘냉각된 평화’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선언은 전쟁 상태 종식과 국경 안정화라는 핵심 목표를 달성한 외교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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