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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과문학 읽기/읽은것 같은 줄거리

『오후 네 시』 줄거리·해석-오후 4시, 공포가 초인종을 누른다.

by 시넘사 2025.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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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네시

1. 작가 소개

벨기에 출신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Amélie Nothomb, 1966~) 는 매년 한 권씩 신작을 발표하며 프랑스어권 베스트셀러 1위를 여러 차례 차지한 ‘언어의 연금술사’입니다. 데뷔작 『살인자의 건강법』으로 충격적 메타 픽션을 선보인 뒤, 『오후 네 시』(1995)는 **“침묵의 폭력”**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독자를 흔들었습니다.


2. 줄거리

인물관계도

에밀 하젤(Émile Hazel, 65) ── 은퇴한 라틴·그리스어 교사
└─ 아내 쥘리에트(62) ── 평생 동료이자 “고독의 동지”
     │
     └─ 이웃 부부
         ├─ 팔라메드 베르나댕(70) ── 전직 의사, 침묵 방문자
         └─ 베르나데트 베르나댕(60대 초) ── 남편의 그늘에 가려진 아내
 

2-1. “은퇴자의 낙원, 고독을 예약하다”

1990년대 프랑스 외곽. 에밀 하젤은 평생의 강단 생활을 마무리하고, 아내 쥘리에트와 함께 숲길 끝 외딴 집으로 이사한다. “이제부터 우릴 방해할 이는 바람뿐이야.” 두 사람은 고립 자체를 사치품처럼 만끽하며, 아침엔 책, 낮엔 산책, 저녁엔 와인을 나눈다.

2-2. “정각 오후 4시, 초인종이 울리다”

입주 첫 주가 끝나갈 무렵—14:00 시계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설렘을 음미하던 오후—정확히 16:00, 초인종이 울린다. 이웃 팔라메드 베르나댕이 문앞에 서 있다. 그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커피 한 잔을 비우고, 18:00가 되자 시계를 확인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돌아간다.

2-3. “침묵으로 구축된 감옥”

같은 방문이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 반복된다. “예의상 한 번은 좋은데 계속이면 지나치지!” 쥘리에트가 항의하려 하지만, 에밀은 “이곳 관습일지 모른다”며 만류한다. 1주, 2주가 흐르자, 부부는 오후 4시를 전후해 긴장성 두통을 경험한다. 침묵은 어느새 형체 없는 무기로 변해 두 사람의 일상을 점령한다.

2-4. “가면을 벗기려다 역공을 맞다”

쥘리에트는 참다못해 베르나댕 부부의 집을 기습 방문한다. 그러나 베르나데트는 남편에게 억눌려 있으면서도 “우리 남편은 친근함을 표현할 뿐”이라며 미소를 짓는다. 쥘리에트가 **“당신도 매일 두 시간을 견디냐?”**고 묻자, 베르나데트는 섬뜩한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2-5. “외부 증인의 탈출, 내부 균열의 심화”

오랜 친구 **지인(판본마다 이름 상이)**이 주말에 머물지만, 팔라메드의 방문과 동시에 얼굴이 창백해져 다음 날 새벽 차로 도망치듯 떠난다. 이제 부부는 도망칠 ‘제3의 목격자’ 없이 서로를 향해 불만을 폭발시킨다. 고독을 사랑하던 둘서로의 고독을 질책하는 기이한 전도(顚倒)가 일어난다.

2-6. “죽음을 유보한 남자, 질식의 밤”

팔라메드는 어느 날 혈관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지만, 의사였던 경력 덕에 치명 부위를 피한다. 에밀이 구급차를 부르고, 살아난 팔라메드는 “당신 덕에 다시 오후 4시를 지킬 수 있겠군”이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극심한 무력감 속에서 에밀은 결행을 택한다. 다음 방문 날 밤, 팔라메드가 소파에 기대 눈을 감은 순간, 에밀은 베개를 꾹 눌러 질식시킨다. 침묵의 폭력에 맞서는 물리적 폭력이었다.

2-7. “의자의 주인은 바뀌어도, 시간은 그대로”

새벽녘, 사체를 치울 방도를 고민하던 에밀에게 초인종이 들린다. 시계는 또다시 오후 4시. 문을 열자 베르나데트가 꽃다발을 든 채 서 있다. 그녀는 말없이 남편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킨다.

에밀은 깨닫는다.
“우리가 집을 차지했어도, 오후 4시는 끝내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다.”

 


3. 해석

『오후 네 시(Les Catilinaires)』 깊이 읽기 ― “침묵은 가장 무서운 폭력이다”

1.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노통브는 **“오후 4시”**라는 일상적 시각 하나로 소설 전체를 조여 나갑니다. 팔라메드 베르나댕이 초인종을 누르는 순간, 에밀과 쥘리에트 부부의 주도권은 박탈되고 집은 더 이상 사적 공간이 아닙니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지는 무언(無言)의 통치는 “대화”가 아니라 “부재”로 주체를 억압하는 장치입니다.

  • 정각 4시 → 개인 생활이 멈추는 타이밍의 폭력
  • 정각 6시 → 해방이 아닌 다음 날을 예약하는 주기적 예고장

침묵과 반복이 결합할 때 시간은 흐르지 않고 **원(圓)**처럼 닫히며, 주인공들은 벗어날 수 없는 미로에 갇힙니다.


2. “좋은 이웃”이라는 사회적 의례의 뒤틀림

초기에는 “시골 인사치레겠지”라며 웃어넘기던 방문이 곧 거절하기 힘든 의례로 변합니다.

  • 거절 = 무례라는 도덕적 명령
  • 맞이함 = 자기 파괴라는 심리적 출혈

노통브는 *“예의(Politesse)가 어떻게 인간을 복종시키는가”*를 집요하게 파헤칩니다. 팔라메드는 물리적 폭력을 쓰지 않지만, ‘기분 좋게 사양하기 어려운 상황’을 설계해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도록 유도합니다. 이 지점에서 침묵은 사회적 포섭이자 가스라이팅의 은유가 됩니다.


3. 침묵의 음향학: 소리 없는 대화

팔라메드가 앉아 있는 두 시간 동안 실질적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통브는 숨소리·시계 초침·컵에 스미는 커피 향 같은 ‘사소한 배경음’을 확대해 독자를 불안으로 몰아갑니다.

  • 침묵 ≠ 음(音)의 부재. 오히려 미세한 환경음이 강조되며 공포를 실체화합니다.
  • 독자는 “언제든 깰 수 있는 침묵” 위에 서 있다는 긴장감 때문에, 말이 터질 때보다 더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결국 말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말할 수 없게 된 사람이 공포를 느낍니다. 에밀 부부가 침묵을 ‘상대의 소유물’로 인정하는 순간, 방어선은 사라집니다.


4. 자리(의자)의 주권 게임

거실의 두 개 안락의자는 왕좌이자 족쇄입니다. 팔라메드가 체공(滯空)하듯 의자에 앉는 동안, 부부는 주의 깊게 상대를 응시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시야에 묶입니다.

  • 의자 = 물리적 공간 + 상징적 위계.
  • 팔라메드가 쓰러지자 빈 의자에 베르나데트가 앉음으로써 “주권 교체”가 즉시 이뤄집니다.

노통브는 권력이란 사람이 아닌 자리에 귀속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폭력의 주체는 교체될 수 있지만, 구조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공포도 지속된다는 결말은 씁쓸합니다.


5. 디기탈리스 커피: 폭력과 해방의 동전 앞뒷면

에밀이 선택한 탈출구는 독초 디기탈리스. 흉악한 물리적 폭력이지만 독자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왜일까요?

  1. 침묵의 폭력이 이미 독(毒)으로 작동했기 때문—행동만 없었지 파괴력은 같았습니다.
  2. 에밀의 범죄는 “기나긴 수동성”의 반동으로 이해되며, 독자는 **‘참을 만큼 참았다’**는 심리적 면죄부를 공유합니다.

노통브는 마지막 순간 도덕적 저울을 확 뒤집습니다. 새 방문자 베르나데트의 등장으로 “해방”은 1초도 지속되지 못하고, 독자는 폭력의 순환을 목격합니다. 디기탈리스 커피는 해방의 열쇠가 아니라 새 사슬을 여는 열쇠였던 셈입니다.


6. 대조와 전복: 고독 vs. 침입

에밀 부부는 “고독을 향유하려” 은퇴 별장을 샀지만, 결국 타인의 고독(팔라메드의 고립된 침묵)에 잡아먹힙니다. 노통브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 “고독은 누구의 권리인가?”
  • “내가 원하는 고독이 타인에게는 폭력일 수 있는가?”

결국 ‘이웃’은 타자가 아니라 고독의 영토를 두고 경쟁하는 또 다른 자기 자신으로 드러납니다. 독자는 에밀·쥘리에트·팔라메드·베르나데트 네 인물을 통해 고독 ↔ 침입의 경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7. 한 줄 정리

『오후 네 시』는 “정시(定時)의 침묵”이 어떻게 일상을 전복하는지 보여 주며, 예의·고독·폭력의 경계선을 무섭도록 세밀하게 지우는 소설입니다.
시간과 자리, 그리고 말하지 않는다는 행위만으로도 인간은 서로를 구속할 수 있음을 증명하죠. 읽고 나면 오후 4시 초인종 소리조차 작은 공포로 들릴 것입니다.


 

4. 함께 읽으면 좋은 책 3권

  1. 『살인자의 건강법』 - 침묵 대신 언어를 무기로 한 인터뷰 결투
  2. 『적의 화장법』 - 우연히 만난 남자가 들려주는 고백이 뒤엎는 일상
  3. 『이방인』(알베르 카뮈) - 무감각과 침묵이 일으킨 비극의 철학적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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